우리나라를 비롯한 고령화·저출산을 겪고 있는 국가에서 공적연금의 노후소득보장 기능이 갈수록 저하되며 퇴직연금 및 개인연금과 같은 사적연금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퇴직연금 역사가 오래된 국가들에선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되고 저성장으로 수익률이 계속 하락하며 연금재정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저성장으로 수익률 하락하며 리스크 편중 ‘위험’

저금리·저성장으로 인한 운용수익률 하락은 기업들이 DB형(Defined Benefit,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에서 DC형(Defined Contribution,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으로 이동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DB형 퇴직연금은 적립금 운용과 퇴직연금 수급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기업이 지기 때문에 적립금 운용수익률이 임금상승률보다 낮은 경우 기업의 부담이 커진다. 반면 DC형 퇴직연금은 근로자 개별 계좌에 기여금을 납입하는 형태로 자산배분 및 위험관리 등을 근로자 개인의 책임으로 운용하기 때문에 개인별 투자성과에 퇴직급여가 좌우된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는 자산운용 리스크가 기업이나 근로자 한쪽에 편중된 DB형과 DC형 퇴직연금의 대안으로 양자가 리스크를 분담하는 ‘하이브리드(Hybrid)형 퇴직연금’의 대표적인 해외사례를 분석했다.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의 대표적인 사례는 네덜란드의 ‘집단형(Collective) DC’와 이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Defined Ambition(DA)’, 일본의 ‘리스크분담형 DB’가 있다.

연금소득에서 퇴직연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집단형DC 퇴직연금’은 법적으로는 DB, 회계상으로는 DC로 인식되는 혼합형 제도다. 영국과 일본의 최근 퇴직연금 관련 논의는 네덜란드의 집단형 DC 제도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집단형 DC는 가입자의 개인 계정 없이 전체 집단을 하나로 운영한다는 점에서는 DB형과 비슷한 반면 퇴직급여 수준이 적립금 운용성과에 따라 변동할 수 있다는 점은 DC형과 유사하다.

적립금 운용성과가 저조해 퇴직자산 적립비율이 낮아질 경우 각 적립비율에 해당하는 산식에 따라 조정률과 퇴직급여 수준이 변동되며 퇴직 시에는 연금자산 풀(Pool)에서 연금이 지급된다.

집단형 DC의 가장 큰 장점은 적립금 운용리스크는 근로자가 부담하지만 집단운영 방식으로 리스크가 집단으로 분산되고 운용비용 절감 및 젊은 현역 가입자의 자산, 수급 단계의 자산이 함께 운용돼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 기대가 가능하다.

영국 노동연금부는 DB형과 DC형의 중간 형태인 ‘Defined Ambition(DA)’를 운용하고 있다.

영국 퇴직연금시장 또한 기업들의 DB형 운영부담이 가중되며 DC형 비중이 증가하고 있어 퇴직 소득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영국정부는 근로자가 자산운용 리스크를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현상을 완화하고 국민의 노후소득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DB와 DC의 특징을 결합한 유연한 형태의 연금제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국 노동연금부은 지난 2013년 개혁안을 통해 DB형 운영기업의 부담 경감과 DC형 가입자의 리스크 경감을 목표로 하는 ‘Defined Ambition(DA)’를 제시했다.

DA 개혁안에서는 평균 수명 등을 감안한 DB형의 유연화, DC형에 원본보증·원리금합계 보장 등의 요소 추가, 집단형 DC 도입 등이 제안돼 있다. 지난해 연금법 개정에서는 DA라는 용어 대신 ‘Shared Risk Scheme’이라고 명명해 리스크 공유라는 취지를 확실히 하고 DB, DC형과 함께 퇴직연금을 3종류로 분류했다. 구체적인 운영방안은 네덜란드와 유사한 집단형 DC를 제시하고 있다.

◆기업과 개인이 각자 위험 분담해 고령화 대응

일본은 ‘리스크분담형 DB’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재흥(再興)전략 개정판’에서는 금융시장 활성화 방안으로 DB형 연금의 운용 리스크를 기업과 근로자가 양분하는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제도 도입이 언급됐다.

일본 정부는 기업이 퇴직연금을 실시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자는 목표 아래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의 한 형태로 ‘지수연동형 Cash Balance(2002년)’와 ‘실적연동형 Cash Balance(2014년)’를 도입한 바 있다.

올해 도입 예정인 리스크분담형 DB의 가장 큰 특징은 노사 합의를 통해 사전에 정해진 ‘리스크 대응 부금’을 적립하고 이를 기업이 일괄적으로 운영한다는 점이다.

리스크 대응 부금은 안정적인 DB 운영을 위해 통상적인 부금 외에 재정 악화를 상정한 적립 부족 리스크를 사전에 예상 및 평가하고 노사 합의에 따라 추가로 적립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DB형은 평상시에는 연금급부를 초과하는 부금 적립이 인정되지 않으며 연금재정이 악화되었을 때 추가 출연을 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러나 연금재정 상태는 경기 상황과 연동되기 때문에 경기 악화로 기업 실적이 안 좋은 시점에 추가 출연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리스크분담형 DB는 기업 입장에서는 통상의 부금에 더해 리스크 대응 부금을 적립하지만 이를 초과하는 적립 부족이 발생할 경우 가입자의 급부도 감소해 기존 DB형과 같이 사후적으로 급부 수준을 증가시킬 필요가 없다.

가입자 입장에서는 리스크 대응 부금의 범위를 초과하는 적립 부족이 발생할 경우 급부 수준의 감소를 겪게 되지만, 부금 범위 안에서는 일부 적립 부족이 발생해도 급부의 조정 없이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하다.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은 집단화를 통한 운영으로 개인이 자산운용을 하는 리스크를 부담하지 않고 전문적인 자산관리를 받을 수 있으며 규모의 경제로 인한 비용절감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젊은 재직자의 자산과 수급단계의 자산을 함께 운영하는 장기투자로 결과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 장수 리스크에 대응하는 효과가 있다.

정인 연구원은 “단 하이브리드형 퇴직연금의 세대간 리스크 분담은 고령화 등으로 재직자보다 퇴직자가 많은 경우 제도 운영이 쉽지 않을 수 있다”며 “네덜란드의 퇴직연금제도는 이 같은 이해 충돌을 협력적인 노사관계와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실제 제도 도입에 앞서 각국의 기존 퇴직연금 운영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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