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으로 만나는 ‘영웅’ <4>

   
 

호메로스가 선택한 가장 모범적인 인간
학습된 용기로 가족·공동체 중심 사고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30~40년 전,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거실 중심의 가옥구조가 등장하게 되자 출판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거실을 장식할 전집류의 출판이 눈에 띄게 는 것이다. 그렇게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의 첫 권은 예외 없이 <일리아스>였다.

호메로스 당대는 물론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등 아테네가 에게 해의 패권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리아스>는 그리스인의 교과서였으며, 서구문명(유럽과 북미)의 뿌리처럼 여겨져 왔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전문가인 H.D.F. 키토는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에서 호메로스의 저작을 그리스인의 성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서사시들이 수백 년 동안 공식적인 학교교육과 일반시민의 문화생활을 통틀어 그리스 교육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란다. 역사학자 폴 존슨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사람 소크라테스>에서 <일리아스>를 유대인들의 경전인 토라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측면에서 끼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읽었던 세계문학전집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빠지지 않고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리아스>가 가진 미덕은 무엇일까?

이 책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그 분노 때문에 그리스연합군은 불필요하게 죽어야했고, 10년을 끈 전쟁은 그리스와 트로이 모두에게 비극적 결말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분노의 비극적 최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분노는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중심소재일 뿐이며, 그 분노의 조절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해진 아킬레우스를 통해 서사시의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저자인 호메로스는 ‘성장 드라마’처럼 보여주던 이 서사시에서 유독 적국 트로이의 등장인물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대작 <문명이야기>를 펴낸 철학자 윌 듀란트는 그의 책에서 “트로이인들은 정복자 그리스인보다 더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신사적인 이들”이라며 “호메로스는 트로이인에 대해 수없이 호의적으로 표현”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호메로스는 영웅 아킬레우스보다 트로이의 헥토르에게 더 큰 애정을 보내고 있다. 이를 <그리스인이야기>의 저자 앙드레 보나르는 다음처럼 설명한다.

“호메로스에게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비중이 약간 다르다. 아킬레우스는 이전의 서사시에 있던 모습 그대로 가져왔지만, 헥토르는 자기 손으로 다시 만들었다. 게다가 약간 덧칠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헥토르는 호메로스가 선택한 인물이다. 특히 모범적인 인간을 고를 때는 다른 누구도 아닌, 헥토르를 고른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왜 헥토르를 편애했는가? 그 답은 아킬레우스처럼 타고난 영웅성이 아니라 학습과 훈련을 통해 갖춘 영웅성을 그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천성적으로 용감한 사람이었다면 헥토르는 배워서 용감해진 사람이다. 또한 아킬레우스는 전투를 신바람 나게 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헥토르는 전쟁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죽음을 앞둔 전투에서 아내인 안드로마케에게 이야기했듯이 그는 훈련을 통해 용감해지는 법을 배웠고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훈련의 목적은 그의 가족과 그의 공동체의 안위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헥토르의 용기를 최상급의 용기라도 말한 것이다. 두려움을 알면서도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두려움을 극복한 용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헥토르도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들처럼 자기 분열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전쟁을 10년 끌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연합군의 공격을 트로이성 안에서 방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가족과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 전투와 맹목적인 충성과 명예를 혼동하고 아킬레우스와의 전투에 맞대결로 임한다. 그의 죽음은 트로이의 패망을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가장 제우스의 덕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를 받았던 헥토르지만, 전략적 차원에서 마지막 선택(아킬레우스와의 전투)은 가장 제우스답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아킬레우스의 파업기간 중에 거둔 그의 승리가 그를 휴브리스(오만)에 빠지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스>의 헥토르는 휴머니티에 충실한 인물이다. 마지막 전투 직전, 그의 어머니인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가 건네주겠다는 포도주가 자신을 나태하게 할 수 있다며 거부했으며, 맞대결보다는 수성 전략으로 승부를 펼치라는 아내 안드로마케의 조언도 거부하고 전장을 향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누구나 두려움에 떨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그는 죽음의 길, 즉 명예를 선택한다. 그것이 호메로스의 가치관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헥토르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죽음을 알면서도 자신보다 강한 적에 맞서는 용기, 손해 볼 것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 어쩌면 공동체가 가장 원하는 캐릭터 유형일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매력적인 리더십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문제는 공동체의 이익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같은 경향성을 보이냐의 문제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주변에서 보다 많은 무명의 헥토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에 걸맞은 보상시스템이 작동한다면, 눈앞의 사적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우선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보다 많은 헥토르의 등장은 결국 공동체(기업, 사회, 국가 등)의 가치관과 보상시스템이 좌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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