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콤 기술연구소 김 흥 재 선임연구원

80년대 초, 아버지를 따라 명동의 한 증권사 지점을 찾았던 나는 일정 시간마다 나오는 시세방송과 이를 칠판에 색분필로 써 내려가던 직원누나, 종이에 가격을 적고 창구로 달려가 주문을 넣는 어른들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주식시장이 마감된 이후 직원 누나에게 몽당분필을 한 움큼 얻어가는 기쁨에 그날 하루는 꽤나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딱히 기술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던 자본시장은 2016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조금 더 빨리 시세를 알아내 분석을 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주문 역시 가장 빠르게 거래소에 전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와 뉴저지를 직선으로 잇는 1300km 거래 전용 광케이블을 설치하는가 하면, 백만 분의 일초 단위로 시장을 분석, 주문을 내기 위해 컴퓨터 천재들을 동원해 알파고 못지않은 알고리즘 트레이딩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첨단산업으로 변화했다.

이러한 속도경쟁은 국내 역시 다르지 않으며 이것이 각 나라의 자본시장 기술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속도 경쟁 이후 또 다른 차원의 경쟁이 필요한 이 때, 금융산업 전반은 성장이 멈춘 듯하다. 이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금리, 노후에 대한 대책이라고는 국민연금 한 가지에 월급을 한 푼 안 쓰고 모아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가지려면 10년이 걸린다는 요즘. 대한민국 금융 허브라는 여의도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재테크로 주식투자를 주변에 권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를 바꿀만한 금융혁신은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 월급쟁이 친구들과 모여 재테크에 대해 얘기하던 중 의외로 자신의 재무상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각각 몇 개씩 되는 예·적금과 대출통장, 보험, 증권, 카드, 연금 등을 일일이 챙겨 관리한다는 것도 무리지만, 모든 것이 손 안에서 해결되는 요즘 변변한 개인 재무관리 애플리케이션도 없다는 것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 다른 친구는 주식투자 좀 하려고 했더니 계좌개설에 프로그램을 설치해도 메뉴만 50~60개가 넘고 특정 금융상품이 무엇을 사고파는 것인지 알기도 어려워 마치 외국어로 쓰여 있는 식당 메뉴판 같았다는 푸념도 귀 기울여 볼만 했다.

인류는 항상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혁신으로 새로운 도약을 이뤄왔다. 과거 수년은 눈에 띄지 않는 내부 시스템의 경쟁이었고, 향후 수년은 고객의 접점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경쟁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 친절하고 섬세한 로보어드바이저(RA), 독립투자자문업자(IFA), 온라인투자자문 및 증권사 중립적 트레이딩 서비스 등 투자자 채널이 다양화됨에 따라 오픈API 등을 활용한 금융투자회사의 채널 개방도가 서비스 차별성과 신규 투자자 흡수력을 결정지을 것이다.

성공한 핀테크 스타트업 CEO 통계를 보니 30대 말~40대 금융회사 출신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들은 기존 금융서비스의 빈틈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혁신의 마중물로 삼았을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금융상품구조, 번거로운 이용절차, 차별화 되지 않는 서비스 등 점(點)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요구들을 선(線)으로 이어 맥락을 만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금융회사마다의 독특한 색과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혁신이 필요하다.

장편영화의 결말은 누구나 감동 있게 그릴 수 있다. 결말까지 이어지는 중간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따라서 기술혁신의 첫 걸음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하는 일부터 저 끝의 고객까지 이어지는 선 위에 어떤 문제와 한계가 있는지, 그것을 찾아 해결할 수 있는 기술들을 잇고, 응용하는 것이 성공확률을 높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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