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금융신문=문혜정 기자> 영국이 지난해 4월 100여년간 지속돼 온 퇴직연금 적립금의 연금화 수령의무를 폐지한 후 일시금으로 수령하는 비율이 대폭 증가했다. 2015년 4월 이전까지는 55세 이후 퇴직연금 적립금의 25%까지만 일시금으로 수령할 수 있고 나머지 75%는 연금 형태로 수령해야 했으며 나머지 적립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할 경우에는 최대 55%의 세율로 중과세 해왔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연금 자유화 이후 중과세 하던 부분을 0~45%의 종합소득세 과세로 전환하고 FAD(펀드형 연금)와 UFPLS(비결정형 연금펀드) 등 새로운 적립금 수령방식을 도입해 가입자의 선택을 확대했다.

연금 자유화 1년… 수령자 행태에 큰 변화
영국의 연금 자유화 이후 1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퇴직연금 수령자의 행태에 큰 변화가 관찰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가입자 절반 이상이 출금이 가능한 FAD나 UFPLS 등을 이용해 퇴직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하고 있는 점이다.

보험연구원은 우리나라 퇴직연금이 노후 소득보장에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연금 자유화 이후 가입자 행태를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원석 연구원은 “연금 자유화 이후 적립금 일시금 수령이 급증한 영국 사례를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퇴직연금 적립금 일시금 수령 시 실효세율을 인상하고 연금수령 시 세제혜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높은 노후빈곤율 완화를 위해 퇴직연금의 연금화 수령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퇴직소득세의 실효세율이 3% 이하로 영국보다 매우 낮은 수준이다. 퇴직연금 적립금 수령방식 또한 다양하지 못해 대부분 일시금으로 수령하는 것이 보편화 돼있다.

영국의 퇴직연금 수령방식은 크게 일반적인 연금(이하 종신연금)을 수령하는 방법과 펀드형태로 더 높은 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드로다운(Drawdown) 방식이 있다. 하지만 연금화 상품인 종신연금의 낮은 이자율과 드로다운의 까다로운 가입조건으로 불만이 커지며 영국 정부는 지난해 연금 자유화를 시행하게 됐다.

종신연금은 가입자 사망 시까지 확정된 금액을 정기적으로 수령할 수 있으며 생명보험회사에서만 판매할 수 있는 반면, 드로다운은 적립금을 주식, 채권 등에 투자해 수익에 따라 매월 또는 분기마다 정기적으로 생활자금을 수령할 수 있다.

단 드로다운은 적립금의 규모와 연령 등을 고려해 연간 상한액 내에서만 적립금 수령이 가능해 종신연금에 비해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연금 자유화 이후 중도인출이 자유로운 FAD(Flexi-Access Drawdown)가 도입됐다. FAD에서 운용되는 자금은 제한 없이 인출이 가능하고 인출 시 다른 소득과 합산해 종합소득세로 과세돼 드로다운 수령 방식을 선택하는 가입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종신연금 인기 ‘시들’ 드로다운 선택 ↑
영국의 연금 자유화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수령하는 계좌 수까지 감소시켰다.

연금 자유화가 시작된 2015년 2분기에 20만계좌가 넘던 적립금 수령계좌 수가 4분기에 12만 7000계좌 수준으로 감소했다. 특히 2분기 수령계좌 수가 전년 동기 9만5372계좌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는데 이는 일시금 수령 가능 시기를 기다려 온 가입자들이 일시에 연금을 수령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반면 종신연금 수령을 선택한 계좌 수는 2013년 2분기 8만9896계좌에서 연금 자유화 이후 같은 기간 동안 1만2418계좌로 2년 전 동일 기간의 14% 수준으로 급감했다.

또 전체 일시금 수령 계좌의 비율이 50%를 넘어 대다수 가입자가 종신연금 대신 일시금으로 수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시금을 수령하지 않은 경우에도 가입자들은 종신연금보다는 적립금을 현금 혹은 연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수령할 수 있는 FAD 혹은 UFPLS 등을 선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연금 자유화 이후 드로다운과 종신연금의 선택비율 또한 역전됐다.

연금 자유화 이전인 2013년 종신연금 판매는 총 35만3000계좌, 판매액은 120억파운드였던 반면 드로다운은 총 2만2000계좌가 판매되고 판매금액은 12억파운드였다.

드로다운은 높은 수수료 및 최소 가입금액 등으로 적립금 규모가 10만파운드 이하인 경우에는 가입이 효과적이지 않았지만, 연금자유화 이후 종신연금을 수령하는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드로다운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실제 자산 및 은퇴관리 전문회사인 영국 Aegon사의 경우 연금 자유화 이후 FAD로 연간 자산 이동이 전년대비 88% 증가했다. 이 같은 드로다운의 성장은 수수료 및 최소 납입금액 하향조정 등 새로운 제도에 민첩하게 반응한 금융회사의 노력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쌓여만 가는 퇴직연금… 영국 사례 반면교사 삼아야
영국 연금 자유화의 특징은 퇴직연금 적립금 일시금 수령에 대한 과세 완화와 적립금 수령 방식 다양화로 요약할 수 있다.

세제 변화 및 다양한 금융상품 제공으로 개인이 스스로에게 적합한 노후준비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했지만, 연금 자유화 시행 이후 가입자와 금융회사는 제도 변화에 예상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현재 우리나라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126조5000억원으로 상당한 적립금이 쌓여 있으며 적립금의 증가 속도 역시 지난 1년간 약 20조원이 증가할 만큼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올해부터 시행된 퇴직연금 가입 의무화 제도가 확대되면 퇴직연금 적립규모는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수령하는 가입자 비율은 1.7%에 불과하며 우리나라의 노후빈곤율을 고려할 때 안정적인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퇴직연금 연금화 수령비율을 높이는 것이 절실하다.

지난해부터 퇴직연금 적립금을 연금화할 경우 퇴직소득세 과세 이연 및 세율 30% 감면 혜택을 제공하고 있지만 가입자 수령 행태에서 의미 있는 변화는 아직 보고되지 않고 있다. 수령방법도 적립금 선택 방법이 일시금과 연금 방식 두가지 뿐이며 연금의 이자율이 낮은 경우 일시금 선택 유인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정 연구원은 “연금 자유화 이후 일시금 수령이 급증한 영국의 사례를 참고해 세제 측면에서는 공제 방식 등을 조정해 일시금 수령에 대한 실질 퇴직소득세율을 인상하고 연금수령에 대한 세율감면 혜택은 강화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며 “또 영국의 사례처럼 금융회사들이 퇴직연금 수령방식 다양화를 통한 연금화 수령 유도에 힘쓸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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