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곡주 항아리에 용수를 박아 맑고 노란 소곡주를 거르는 장면.
‘마오타이’ 부럽지 않은 전통주의 지역 강자
1500년 전통, 백제문화 이은 달착지근한 술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신성리 갈대숲을 끼고 금강이 바다와 접하는 서천 땅에 시인 박목월이 노래한 술 익는 마을이 있다.

시인 조지훈은 ‘완화삼’이라는 시에서 “술 익는 강마을의/저녁노을이여”라는 구절을 넣어 박목월에게 보내고, 박목월은 이에 대한 답시로 ‘나그네’를 쓰게 된다. “술 익는 마을에/타는 저녁놀”쯤은 누구나 읊조릴 줄 아는 애송시 ‘나그네’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 시 구절처럼 모시로 유명한 서천군 한산면은 집집마다 술을 빚어 향긋한 술 내음에 취하는 마을이 되어 있다.

백제 술의 전통을 이어가며 1500년 동안 술을 빚어왔다는 한산의 ‘소곡주’. 한 번 쯤은 들어보았고 맛도 보았을, 충남의 무형문화재이기도 한 오랜 역사를 가진 술이다.

현재 면허를 내고 소곡주를 빚고 있는 제조장은 46곳에 달한다. 집에서 쓰기 위해 술을 빚는 집까지 포함하면 수 백 곳에서 소곡주가 익어가고 있으니, 가히 술의 고장이라고 부를 만큼 술의 전통이 넓고 깊은 동네이기도 하다.

서천군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살려 자신들의 명주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부터 소곡주 축제를 열고 있다. 올해는 보다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신성리 갈대축제와 연계시켜 ‘1500년의 맛과 향’이라는 주제로 지난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한산면 일대에서 펼쳐졌다.

축제기간 동안 20여 곳의 소곡주 제조장들은 자신들만의 술맛과 향을 비교하는 품평회를 진행하는 한편, 다 빚어진 소곡주 항아리를 축제장에 내어 용수(전통주 거르는 기구)를 박아 직접 술을 거르는 시연회를 가졌으며, 화덕에 불을 지펴 전통 소줏고리를 걸고 불소곡주를 증류하는 장면까지 축제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쯤 되면 중국 구이저우(귀주성)에서 빚고 있는 바이주(白酒) ‘마오타이’가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엮으면서 한국 술 문화의 한축을 쌓아가는 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지난달 말 서천군 한산면에서 열린 소곡주축제, 주제관에 전시된 소곡주 제품들.
소곡주는 누룩을 적게 넣는데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또한 물의 양도 절반 정도로 적게 넣어 술의 단맛을 최대한 이끌어낸 술이기도 하다. 꿀과 조청 등이 귀했던 시절, 쌀로 술을 빚으면서 술의 취기와 당을 함께 이끌어내려 한 것으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소곡주는 멥쌀과 찹쌀, 그리고 누룩이 원재료로 들어간다. 여기에 콩과 고추를 넣기도 하는데, 이는 술이 오염되지 않도록 소독하는 것과 부정 타지 않게 하려는 옛 선조들의 마음이 전승된 까닭이다. 또한 제조장에 따라 호박, 국화, 모시잎, 생강, 솔잎 등을 추가로 넣어 각자의 독특한 맛을 이끌어 내고 있다.

달착지근한 맛에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잔을 기울이게 되는 소곡주는 술자리가 길어지면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도 이곳 한산의 주막에서 소곡주 몇 잔에 일어서지 못하고 종국에는 과거까지 놓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이니, 과히 술맛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양성화되어 46곳의 제조장에서 술을 빚어내 전국의 애주가들의 손길을 잡아채고 있지만, 17년 전까지 소곡주는 동네 아낙네의 손끝으로 전승되어 집안에서나 맛볼 수 있는 술이었었다. 그나마 우희열 명인이 소곡주 면허를 내고 술을 빚으면서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해, 지금은 면허를 낸 소곡주 제조장 모두가 상압 방식으로 ‘화주’라는 이름으로 소주를 내려 시판하고 있을 정도로 소곡주의 종류와 방식도 다채로워지고 있다.

술을 만드는 과정은 과학이지만, 마시는 행위는 문화에 해당한다. 마을 전체가 소곡주라는 이름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맛과 향을 뽐내는 한산은, 그래서 우리 전통주의 새로운 메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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