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쌀로만 두 번 빚고, 쌀과 물 같은 비율로 양조

임금의 술이 반가 가양주로 내려온 무형문화재

   
▲ 전남 무형문화재 25호로 선정되어 있는 해남 진양주의 최옥림 기능보유자.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명주 반열에 오른 대개의 전통주들은 제사와 같은 집안의 대소사와 손님접대를 위해 민가에서 빚어오던 술이 임금께 진상되는 절차를 밟는다. 맛이 있어 임금께 올려 졌다는 스토리텔링은 술을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중심에 두는 우리 문화에서 가문의 격을 높일 수 있는 좋은 소재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산 연엽주와 함양 솔송주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의 술 제조법을 다루고 있는 <산가요록>에는 아예 ‘진상주’라는 이름의 멥쌀과 찹쌀로 빚은 술의 주방문(제조법)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의 임금들은 다양한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금주령’을 자주 내렸던 영조는 ‘송절주’를 차라고 말할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마셨다고 하고 세종은 ‘법주’를, 연산군은 ‘녹파주’, 숙종은 ‘삼해주’, 고종은 ‘이강주’ 등의 술을 즐겼다고 한다. 이렇게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던 술이 반대로 반가에 내려온 경우가 있다. 임금이 특별한 목적으로 하사해서 집안의 가양주로 자리 잡은 경우도 있지만, 궁중에서 술을 빚던 상궁이 궁을 나와 반가의 후실로 들어가 가양주가 된 어주도 있었다.

조선 헌종때 이조 좌랑과 사간원 사간을 지낸 김권이 영암으로 낙향하면서 시작된 진양주(眞釀酒)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물론 지금은 영암이 아니라 이웃한 해남 땅에서 빚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사연은 이렇다. 김권을 따라 후실로 내려간 최 상궁은 광산 김씨 문중 행사 때 쓰기 위해 술을 빚었는데, 술맛이 좋아 문중 내에 소문이 떠들썩했다고 한다. 찹쌀로만 두 번 술을 빚는 이양주(二釀酒)인데다 물의 양도 쌀과 일대일 비율로 넣은 이 술은 어쩌면 꿀과 같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요즘처럼 꿀과 설탕이 지천인 세상에선 단맛을 손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술의 단맛이 부족한 당을 보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물의 양을 쌀보다 적게 넣어 빚는 술이 반가의 가양주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빚어지던 술이 해남 땅으로 이어진 사연은 김권의 손녀딸이 해남 덕정마을의 장흥 임씨 집안에 시집을 가면서부터이다. 마을이 들어선 입지가 솥의 형국이어서 솥정(鼎)자를 쓰고 있는 이 마을은 그래서 우물을 함부로 파지 않고 공동 우물 하나로 마을 전체가 식수와 생활용수를 해결했다고 하는데, 이 물맛이 영암 광산 김씨의 물보다 맛있어서 손녀가 빚은 술이 더 맛있다는 평을 듣게 된다.

그리고 200년 정도 장흥 임씨의 가양주로 제사 때나 사용되었던 이 술은 23세에 임씨 집안에 시집을 온 최옥림씨에게 전수되었고, 지난 1994년 전남 무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면서 시중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진양주라는 이름은 찹쌀(眞米)로 빚어져 붙여진 이름이다. 밝은 노란빛을 띠며 달보드레한 맛을 내는 이 술은 한산의 소곡주를 많이 닮은 듯하다. 찹쌀 한 말에서 술 한 말이 나왔으니, 그도 그럴법하다. 하지만 바디감이 경쾌하다. 걸쭉하지 않은 목넘김이 이 술의 장점인 듯하다. 밑술을 고두밥을 사용하지 않고 죽으로 빚은 것이 술의 특징을 만들어낸 것 같다.
 

   
▲ 술 빚는 과정을 제외한 나머지 과정은 반자동화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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