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식 소주 한계 넘어 천연 증류향 즐기는 고객 증가

롯데 ‘대장부’외에 업계, 무작·고운달·풍정사계 등 출시

   
▲ 지난해 연말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진행된 2016년 우리술 축제장 한켠에 전국에서 생산된 증류소주와 일반증류주들이 모아져 있는 모습. 진로의 일품진로와 화요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진 술을 포함해 각 지방의 식품명인들이 만든 소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류주가 소개되고 있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나의 증류기 그대 두 눈은 나의 알코올”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그의 시집 <알코올>의 헌사에 담은 글이다. 사랑이라는 감정과 증류의 과정을 적절한 운율로 담고 있는 그의 시는 그래서 ‘화주’로 모아진다.

불을 피워 더욱 순순한 알코올을 얻는 과정은 신석기 농업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우연하게 발견한 발효 과정만큼 신비했을 것이다. 불로 태워 만들어낸 술은 발효를 거친 술의 알코올 도수 한계선인 19%를 훌쩍 넘긴다. 항아리로 만든 소줏고리도 60% 이상의 알코올 도수를 지닌 술을 만들어냈으며, 동증류기는 70% 이상의 알코올 수율을 내고 있다. 그래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증류주는 불에 태운 술이라는 명칭을 가치고 있다.

과일주를 증류한 술을 칭하는 브랜디의 어원이 ‘불에 태운 술(burnt wine, 어원은 네덜란드어 브란데베인)’이며 우리가 마시는 소주도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인 불태울 소(燒)와 술 주(酒로)로 구성돼 있다.

증류소주가 최근 애주가들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롯데주류의 ‘대장부’이다. 희석식 소주가 전국을 평정하고 있는 가운데, 가격 경쟁력과 향미를 가진 증류소주가 시장에 등장하면서 소주 시장의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지난해 전통주 업계가 새롭게 출시한 술들 중에 증류소주가 제법 많이 포함돼 있다.

특히 2~3년 이상을 항아리에서 숙성시킨 고급 증류주들도 여럿 포함돼 있다. 홍천에서 자체적으로 누룩을 빚어 막걸리와 청주를 내고 있는 ‘전통주조 예술’이 ‘무작 53’이라는 이름의 고급 증류주를 냈으며, 국내 처음으로 오미자 와인을 내고 있는 ‘오미나라’에서도 항아리와 오크통 숙성, 두 가지 버전으로 ‘고운달’이라는 증류주를 발표했다. 법주 스타일로 빚어 4가지 종류의 전통주를 지난 해 발표한 풍정사계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한 2016년 우리술품평회에서 증류소주 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생쌀발효로 막걸리를 빚어온 배혜정도가는 10년을 준비해 향기로운 증류주 ‘로아’를 발표하고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덕분에 증류소주 시장을 열기 위해 ‘화요’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시절은 이제 곧 마감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통주 업계의 증류주에 대한 적극적인 행보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한 해에 국민 1인당 60병 이상의 소주를 소비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값비싼 증류주를 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주는 향으로 마시는 술이다. 목을 넘기면서 입에서 코로 들어오는 향이 알코올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맛을 주는 술이라는 것이다. 몰트위스키와 와인, 크레프트 맥주 등 향으로 애주가들을 불러 모았던 술들처럼, 증류소주가 제조과정에서 자연적 생성된 곡물향을 토대로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다. 알코올 도수 95%의 주정을 만들어, 물을 넣어 향과 감미료를 넣는 희석식 소주와 달리 증류과정에서 생긴 단맛의 향과 알코올 녹아든 과일향 등이 섬세한 애주가들이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환경의 일본 주류시장에서 2003년을 기점으로 증류소주가 희석식 소주를 압도한 것처럼, 소득을 갖추고 향을 찾는 애주가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시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고, 이를 민감하게 읽어낸 결과가 주류업계의 증류주 생산 바람이다.

“증류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자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저서 <주기율표>에 쓴 증류에 대한 표현이다. 그가 증류에 주목한 이유는 액체에서 증기로, 그리고 증기에서 다시 액체로 아름다운 변신을 하는 과정이다. 순수한 결정을 만들어내는 증류의 여정은 느리고 조용하며, 철학적으로까지 그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마시는 순간, ‘영혼’을 북돋우며, 지친 몸에 활기를 불러일으켜주는 증류주. 그래서 프리모 레비는 증류를 불완전한 물질에서 고갱이(정수)가 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술시장도 고갱이를 찾아가는 애주가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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