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진액과 약초로 고듯이 내린 증류 소주

태인양조장 ‘송명섭 명인’ 손길에서 화려한 비상

   
▲ 죽력고는 대나무를 3일간 고아서 뽑아낸 대나무 진액과 함께 대잎, 솔잎, 석창포, 생강 등의 약재가 추가로 더 들어간다. 이들을 술덧과 함께 7시간 동안 증류시켜 술을 얻는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1946년)에서 조선의 3대 명주 중 하나로 칭해졌으나 해방공간을 지나면서 그 명맥을 잃고 사라졌다가 2000년 전후해 전통주 부활의 움직임 속에서 겨우 되살아난 술. 고전 <춘향전>에서 춘향은 자신의 집을 찾은 이몽룡에게 주안상을 받아 올리는데, 그 술중에 버젓이 이름을 올린 술이자, 우암 송시열이 자신의 시문집 <송자대전>에서 ‘진시절미(眞是絶味)’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술이 있다. 죽력고(竹瀝膏)가 바로 그 술이다.

푸른 대나무를 토막 내 항아리에 넣고 불을 지펴 대나무의 몸통을 상하지 않게 온전하게 진액을 내려, 약초(대잎, 솔잎, 생강, 석창포, 계심 등)와 함께 고듯이 소주를 내리는 술이 바로 죽력고이다. 술 만드는 이력이 약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서인지, 이 술은 실제 약으로도 활용되었다. 구한말,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이 남긴 책 중 동학농민전쟁을 기록한 <오하기문(梧下記聞)>에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서울로 압송당하면서 부상당한 자신의 몸을 회복하기 위해 죽력고와 인삼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정약용의 시 속에도 등장하고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책인 <증보산림경제>(유중림, 1766년)와 <임원경제지>(서유구, 1827년) 등에도 소개된 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증류소주의 이름에 왜 ‘고(膏)’라는 한방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삼양춘’ ‘동정춘’과 같은 좋은 청주(주세법 상 약주)에 ‘춘(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膏)’는 예전 선조들이 증류한 고급술을 부르던 이름이다. 오랜 시간 고듯이 술을 내리기 때문에 부쳐진 명칭이기도 하다.

죽력고는 전북 태인에서 양조장을 하고 있는 송명섭 명인이 빚는 술이다. 송명섭 명인은 막걸리를 즐기는 주당들에겐 이젠 익숙한 이름이다. 아스파탐을 넣지 않아 드라이한 맛을 내는 ‘송명섭막걸리’를 이제는 서울의 이름 있는 막걸리전문점에선 거의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식품명인체험관에서 지난 달 25일 열린 죽력고 시연회에서 송명섭 명인을 만났다. 태인양조장을 비우고 부인과 함께 죽력고 시연을 위해 상경을 한 것이다. 2시간 넘게 이어진 그의 술 강연은 우리 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물과 누룩, 그리고 지역의 좋은 쌀만을 가지고 빚은 우리 술은 외국의 그 어떤 명주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명섭 명인이 죽력고를 빚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 은계정씨가 죽력고 내리는 비전을 그의 아머지 은재송 씨로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송 명인의 외조부 은재송 씨는 한약방을 하면서 늘 도움이 될 만한 술의 비방을 모아 죽력고 등의 술을 빚어 치료보조제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를 어머니가 배워 그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 2000년에 복원에 성공하고 2003년 전라북도로부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것이다.

   
▲ 서울 강남 전통주갤러리에서 자신이 빚고 있는 죽력고를 설명하고 있는 전북 무형문화재 송명섭 명인.

실제 이 술은 술도가를 하던 송 명인의 부친이 젊어서 중풍을 앓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빚은 죽력고를 마시며 병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좋은 술을 빚기 위해 밑술을 담는 과정부터 차별화시키고 있다.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쌀, 그것도 찹쌀과 멥쌀을 농사지면서 쌀알이 굵고 생육이 빠를 벼만을 따로 수확해 몇 년 전부터 이 품종만으로 농사짓고 있다고 한다. 누룩을 만들기 위한 밀과 2모작을 하기 위해선 생육이 빠른 품종이 도움이 되고 쌀알이 굵고 단백질 성분이 적은 쌀은 좋은 술을 내는데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재료로 한 달 가량을 숙성시킨 술을 죽력과 함께 넣어 7시간을 고아 내린 술. 맑고 투명한 황색에 점성까지 느껴질 정도로 진하고, 죽력의 단맛과 알코올 32도의 강한 맛이 조화롭게 넘어간다. 목넘김 후에 느껴지는 대나무향과 술의 단맛은 중국술을 굳이 떠올릴 이유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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