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만 해도 일반 대중에게 생소했던 ‘자산관리’라는 단어는 이제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개념이 됐다. 그 배경에는 국민소득 증가로 늘어난 자산가 계층과 인구 고령화에 따른 상속 및 증여 유인 확대로 장기적인 자산관리서비스에 대한 니즈가 높아진 데서 찾을 수 있다.

공급 측면에서도 은행의 안정적인 수익원이었던 예대마진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은행은 새로운 영업수단을 개척할 필요성이 커졌다. 여기에 잠재성장률 하락에 따른 저금리 기조는 이자율 축소를 부추기며 은행 스스로 자기 자본이 소요되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자산관리 영업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 장기자산관리에 특화된 금융상품 ‘신탁’

한국금융연구원은 국내에서 아직 활성화되지 못한 ‘신탁’을 나이, 소득, 재산, 부양가족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장기 자산관리서비스에 특화된 금융상품으로 지목했다.

신탁은 중세 영주가 전쟁이나 성지순례에 나가면서 유사 시 미리 지정한 상속인이 영지를 인계해 관리하도록 하는 잘만(Salmann) 제도에서 시작됐다. 신탁(Trust)은 기본적으로 믿고 맡기는 ‘신뢰’와 ‘계약’에 기반을 두고 사적 계약을 통해 자산이 관리되기 때문에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고객의 수요와 상황에 따라 유연한 운용·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고객의 니즈를 맞춤형으로 고려해 여러 자산을 한 계좌로 통합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신탁에서만 가능하며, 다른 금융상품과 달리 주식·채권 등 다양한 금융자산을 통합 관리하거나 금융자산과 함께 부동산, 재산권 등 다양한 비금융자산을 통합 관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탁회사는 사적 계약으로 많은 재량권을 위임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신인 의무(Fiduciary duty)’가 부과된다. 신인 의무는 신탁업자가 전문가로서 그에 상응하는 전문지식과 역량을 활용해 자산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의’ 의무와 고객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이익만을 위해 자산을 관리해야 한다는 ‘충실’ 의무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탁법과 자본시장법은 해외 주요국의 주의 의무 및 충실 의무와 비교해 상당히 낮은 수준의 의무가 부과된다. 주의 의무에서는 전문가 요건이 배제돼 있으며 충실 의무에서는 ‘최선 이익’이 아닌 ‘단순 이익’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국내 신탁업은 지난 2010년 이후 금전신탁 위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올해 3월 말 현재 금전신탁 380조원, 재산신탁 357조원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임형준 연구원은 “우리나라 신탁시장을 깊숙이 들여보면 개인 고객에게 장기적인 자산관리서비스를 제공하는 부분은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며 상당수가 상품의 일회성 판매 채널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재산신탁의 경우 대부분 기관투자자와 법인 위주로 영업이 이뤄지고 있으며 개인을 대상으로 한 종합재산신탁은 전무한 상황이다. 실제로 은행의 자산유동화를 위한 금전채권신탁(158조원), 담보대출을 위한 부동산담보신탁(126조원), 토지개발 및 건축을 위한 부동산토지신탁(47조원)이 재산신탁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금전신탁 또한 신탁으로 분류되는 퇴직연금을 제외하면 주로 단기∙일회성 상품인 주가연계신탁(36조원), 정기예금형 신탁(82조원), 법인 위주 단기 수시입출금 신탁(49조원), 1년 미만 계약으로 주로 기업어음(CP)을 편입하는 채권형 신탁(81조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투자위임 제한하는 국내 법…성장 발목 잡아

우리나라 신탁업이 개인의 장기 자산관리서비스로 정착되지 못한 데는 ▲관리의 대가로 지속적인 보수를 지급하고자 하는 개인수요의 부족과 함께 ▲금융회사의 자산관리 영업 역량과 의지 부족 ▲국내 신탁 제도 및 감독 측면에서 여러 가지 제약요인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나라의 경우 고객이 신탁회사에 투자판단을 위임하는 것을 법으로 제한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금융자산을 관리하는 신탁으로 ‘특정금전신탁’을 허용하고 있는데 특정금전신탁은 자산 매매 등 운용 변경 시 고객이 계약서에 해당 내용을 자필로 기재하도록 규제된다.

장기간 고객 자산을 관리하다 보면 자산 매매가 발생하고 그때마다 고객이 지점을 방문해 해당 사항을 자필로 기재해야 하기 때문에 금융회사와 고객 모두 신탁을 장기 운용하는 데 불편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신탁시장은 자연스럽게 장기 자산배분이나 관리보다는 특정 상품을 일회성으로 판매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임 연구원은 “신탁의 기원과 본질은 ‘믿고 맡기는 것’이며 고객이 계약 때문에 신탁업자에게 투자판단을 위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은 신탁계약에서 투자판단 위임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들 국가에서는 신탁을 별도로 정의해 규율하기보다는 고객에게 투자판단을 위임받은 금융회사가 신탁에 준하는 고객보호 의무를 지는 접근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과 호주는 일임계좌형 상품을 운용하는 금융회사와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회사에게 신인 의무를 부과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신인 의무가 없는 투자일임업자에게만 투자판단 위임을 허용하고 있다.

◆해외 주요국, 신탁공동기금 조성해 효율적 투자∙관리

신탁이 장기 자산관리서비스로 정착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신탁회사에서 여러 신탁계좌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돼 있는 점이다.

거액 자산가라도 매매 단위가 큰 채권이나 상업용 건물을 혼자 소유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여러 신탁고객 재산 중 채권이나 상업용 건물에 투자되는 금액을 모아 투자가 이뤄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변액보험이나 퇴직연금의 경우 금융회사에서 채권투자나 부동산투자용 기금 등으로 자금을 모아 투자하는 행위를 허용하고 있지만 신탁상품에는 이를 제한하고 있다. 대신 신탁회사가 개별 증권을 매입한 뒤 여러 신탁계좌에 투자금액에 따른 지분율로 나눠 편입하도록 하고 있다.

만약 100억원 국채의 10분의 1을 편입한 신탁고객이 출금을 요구한다면 해당 국채의 10분의 1만 시장에서 매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탁회사는 국채 1/10 지분을 다른 신탁 계좌에 떠넘기거나 자기 고유계정에서 매입해 주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두 거래 모두 투자자 피해가 발생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호주 등에서도 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결국 국내 신탁회사들은 신탁의 장기운용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미국, 호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여러 신탁계좌의 재산을 공동기금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집합투자’가 공모펀드나 불특정 금전신탁과 같이 여러 수익자의 재산을 하나의 상품으로 모집한 뒤 동일한 포트폴리오로 집합 운용하는 방식이라면, ‘공동기금’은 고객별로 맞춤형 포트폴리오를 다르게 운용하지만 자산배분 결과에 따라 동일유형에 투자하는 자금을 모아서 관리하는 형태다.

예를 들어 미국은 신탁회사에 두 가지 형태의 공동투자기금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 중 A1 유형은 신탁회사의 신탁고객 재산을 자산유형별로 모아 공동기금으로 관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호주에서도 신탁회사가 미국의 공동투자기금과 유사한 공동기금을 조성해 여러 신탁계좌의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낮은 투자자 보호 의무가 신뢰도 하락시켜

신탁회사의 신인 의무에 대해 적절한 투자자 보호 규제가 이뤄지지 않는 점 또한 신탁의 신뢰와 수요를 저해하고 있는 주요 요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신탁업자에 부과되는 신인 의무(선관 의무와 충실 의무)는 선진국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미국과 호주에서는 신탁회사가 단순히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를 기울이는 데 그치지 않고 전문가로서 그에 상응하는 전문지식과 역량을 발휘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탁회사는 다른 특별한 근거가 없는 이상 비용이 높은 액티브펀드 대신 ETF나 인덱스펀드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충실 의무에 관해서도 수익자의 이익만을 위해 신탁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사 또는 계열사 상품을 편입하는 등 회사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명시적으로 금지돼 있다.

또 미국, 호주, 영국 등 주요국에서는 자사나 계열사 상품의 편입, 높은 신탁보수, 제조업자로부터 보상수취 등 신탁회사가 신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준수해야 할 원칙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이해상충 소지를 방지하고 있다.

부실계열사의 CP를 판매해 문제가 된 동양증권의 경우 신탁회사에 전문가로서 주의 의무와 수익자의 이해만을 위해야 하는 충실 의무가 부과되어 있었다면, 수익자의 최선 이익을 희생해 자사와 계열사의 이익을 추구한 행위에 대해법적 책임을 지게 됐을 것이다.

◆인력 전문화와 시스템 자동화 병행돼야  

한국금융연구원은 “우리나라의 신탁이 개인의 장기 자산관리서비스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해외 주요국과 같이 신탁에 투자판단 위임을 허용하고 신탁회사가 신탁고객의 재산을 공동기금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허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개인이 신탁회사에 자산관리에 대한 판단을 위임할 수 있어야 비로소 후견인 신탁 등 장기 신탁계약이 가능하며 자산내역 변경 시 이를 즉시 통지해 고객보호 규율이 가능해진다.

또 신탁회사가 공동기금을 활용할 수 있다면 고객에게 좀 더 실질적이고 다양한 자산배분을 제공할 수 있고 위험분산의 실효성도 크게 제고될 수 있다. 채권을 보유하더라도 여러 만기·등급의 다양한 채권을 편입하고 상업용 부동산을 소유할 경우 지역과 임차고객이 다양한 여러 건물에 투자할 수 있다.

고객자금 출금 시에도 공동기금을 활용하면 공동기금이 보유한 유동성으로 출금에 대처할 수 있고 무엇보다 자산을 매매할 때 시장에서 시가로 매매하기 때문에 불건전 영업행위 소지가 차단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임 연구원은 “신탁인력이 전문화된다고 해도 개별 직원이 고객의 자산, 나이, 소득, 부양가족, 세금 등을 고려한 자산 배분을 모두 결정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비전문적일 수 있다”며 “고객의 맞춤형 자산배분과 절세를 지원할 수 있는 자동화된 프로그램 개발을 함께 지원하고 정책적 개선과 은행의 자구 노력이 병행된다면 신탁은 고령화 사회의 자산축적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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