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개발되고 있지만 새로운 제도에 담길 사상은 안보여

금융산업 미래상 그려내지 못하고 메시지로만 면피하는 상황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혁명은 권력의 빈 공간을 기다린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던 제도와 의식이 한계에 달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공백이 발생하게 되고, 그 틈을 노려 혁명은 재빠르게 기동한다. 정치적 혁명의 대부분은 경제 위기에서 비롯돼 정치, 사회적 파열음을 내게 되고, 그 파열의 규모를 기존 질서가 감당하지 못하면 성공한 혁명으로 기록된다.
 
경제적 틀거리를 변화시키며 인류의 삶을 개선해온 농업혁명과 산업혁명도 정치혁명의 진행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농업혁명은 농사에 눈을 뜬 신석기인들이 수렵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면서 일상적 노동 체계로 이행하는 과정과 최초로 발생한 잉여를 두고 혁명이라 칭하게 된다. 산업혁명도 기계력의 놀라운 성과를 확인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며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혁명이 제도의 변화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제도는 물론 그 제도를 지배하는 사고체계까지 새롭게 구조화될 때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실패한 혁명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사고의 정체에서 비롯된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하게 된다.

제4차 산업혁명이 불이 난 호떡집처럼 요란하기만하다. 그 실체가 ‘있다 없다’를 두고도 말이 많다. 그러니 말의 성찬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은행은 물론 금융회사의 수장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바일과 핀테크가 주도하고 있는 이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신들의 은행과 회사가 관련 기술을 업계에서 가장 빠르게 개발하고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홍보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했다는 것만으로 제4차 산업혁명 대열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혁명은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곤 한다. 그것도 현재 눈에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양태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에 대한 두려움을 초조함이 이어받는다. 

모바일과 핀테크가 주도하는 문화는 분명, 중심 트렌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개발하고 있는 방향과 적용하고 있는 기술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 있는 곳이 문의 안쪽인지 바깥쪽인지 알 수 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장들의 메시지 전략으로라도 현재의 불안감을 떨치고 싶은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변화를 주장하는 메시지는 많지만, 그 메시지에서 건질 수 있는 변화의 방향은 읽어낼 수가 없다. 게다가 변화하는 제도와 기술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그 제도에 채워질 사고와 기술에 녹아들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2600년전 에게 해의 중심 도시였던 밀레토스의 현인 탈레스는 일식을 예견해내 5년간의 긴 전쟁의 마침표를 찍게 했다. 6분간의 개기일식이 끝나자 신의 섭리를 읽어냈다며 그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하고 적국인 메디아와 리디아는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신화와 신으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시절, 관찰과 이성에 의한 판단능력은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론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585년 5월 28일을 철학의 생일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경제적 여유를 토대로 정치적 관용을 일궈낸 밀레토스는 새로움을 향한 지적 활동을 개시한다. 그리고 그 전통은 아테네로 넘어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통해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런데 아테네로 주도권이 넘어온 뒤에 발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보여준 아테네 시민들의 태도는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아고라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의사결정과 상거래 등에선 현인들이 사용한 방법을 채택했지만 여전히 사적 영역은 신과 신화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지중해 패권을 두고 촉발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후반기,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군이 시라쿠사에서 한판 승부를 겨를 때인 기원전 413년. 아테네의 병사들은 패배의 위협 속에서도 꿈쩍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월식이었다. 여전히 이성적 판단을 앞서는 신과 신화의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을 두고 외경심을 보이면서도 그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20세기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250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은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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