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문법에 얽매인 금융권, 새로운 상상력은 바닥?

분위기 일신을 위한 과감한 워딩과 행보가 필요한 시점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신화는 당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체계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물리적 힘, 그리고 정신으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상상력의 결집체인 것이다.

그래서 신화는 연약한 인간들이(신화가 만들어질 당시) 현실의 곤경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돌파구인 것이다. 

그렇다고 신화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신화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던 시절, 인류는 오로지 죽음과 파괴의 신성한 힘에 대항한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 먹을 것을 얻었고, 그 것은 농경과 수렵을 가리지 않았던 당대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도피의 수단으로서 신화가 기획됐다기보다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결정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는 선사시대에만 유효한 상징체계일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첨단 과학 문명이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21세기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막스 베버는 신화가 가진 주술성에서 벗어나야 근대로 이행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부정의 대상으로서의 신화를 언급했지만, 현실은 그런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아직도 신화의 스토리텔링을 먹고 현실의 고단함을 극복하고 있는 연약한 인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술적 의미까지는 아니지만 현실에서의 신화는 사방에 산재한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눈을 돌리는 곳이면 어디든 뚜껑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신화는 등장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다. 

정치에선 이제 그 바닥이 드러난 ‘박정희 신화’와 그리고 이제부터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노무현 신화’가 있다. 박정희 신화는 보수 세력의 재건을 위해 극복해야할 신화로서 현재 거론되고 있고, 노무현 신화는 대한민국의 성장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빠졌거나 놓쳤던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의미를 다시 부여하면서 이야기되고 있는 신화다.

경제계에선 더 많은 신화가 양산돼 있는데, 괄목상대한 경제의 성장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의 공간에서 우리는 ‘정주영’, ‘이병철’ 등의 상상력을 능가하는 새로운 신화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답은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그렇다면 금융권은 어떠할까. 은행과 보험, 증권사의 신화는 어떠한가. 바라보는 시각과 규모의 차이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아서일지는 모르지만, 이곳도 신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신화는 IMF 구제금융 이후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규모가 커진 일부 금융사 내지 금융지주회사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라응찬, 김승유 등의 이름은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금융권 특유의 스토리텔링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젠 그러한 신화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인 듯싶다.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나 극복해야 할 20세기의 금융 문법이 여전히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화 출현의 가능성은 높지만 제도적 틀거리는 여전히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다. 

주총 시즌이 다가올 때마다 CEO는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직내부의 특정집단 혹은 정치권력에 기대 자리를 만드는 것이 비일비재했던 곳. 게다가 구시대의 프레임은 여전히 오늘을 제어하며 새로운 시각을 막아내는 곳. 

그 결과를 우리는 지난 2년에 걸쳐 확인하고 있고 오늘도 목도하고 있다. KEB하나은행의 함영주 행장과 이광주 전 우리은행장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박인규 DGB대구은행장은 구속 상태다. 새로 내정된 김경룡 대구은행장 내정자는 채용비리와 관련 혐의를 벗었다는 것이 주요 뉴스로 등장하는 시대다. 가히 은행장 수난시대다. 과거에는 정치적 외압 등에 의한 불법대출들이 수난의 원인이었다면, 지금은 채용비리 등 조직 내부의 문제로 곤경에 빠진 은행장들이 수북하다.

논리는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고, 논리를 적용할 조직과 사람은 손끝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선 그 어떤 신화도 불가능하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인 것 같다. 분위기 일신을 위해 과감한 행보와 워딩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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