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지킴이’ 혜곡, 개성 박물관 서기 시절 스승과 소주 즐겨

개성, 몽골서 들어온 증류법 이용해 이름난 명주 빚던 술의 고장

▲ 200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시민들에 의해 보전괴고 있는 시민문화유산 1호인 성북동 소재의 최순우 옛집의 대문. 이 집은 ‘ㄱ자’ 안채와 ‘ㄴ자’ 사랑채로 구성돼 있고 전체적으로 ‘ㅁ자’를 이루는 근대식 한옥이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천상 선비였다. 성북동의 단아한 한옥, 최순우 옛집은 미수의 나이쯤 된 근대한옥으로 모나거나 과하지 않았으며, 소나무와 산사나무가 심어져 정갈하게 정리된 마당의 정원과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두문즉시심산)’이라는 뜻의 사랑방 현판의 내용처럼 집은 고스란히 집주인을 닮았다.

시인 조지훈의 집(방우산장)과 평생의 스승이었던 간송 전형필의 보문각(현 간송미술관)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옛집에서 최순우 선생이 거처한 시기는 제4대 국립박물관장을 맡고 있었던 그의 말년(1976~1984)이었다. 개발과 근대화라는 가치가 세상 살아가는 유일한 문법이 돼 우리를 지배했던 시절, 그의 집은 밤을 하얗게 밝히며 ‘우리 것’과 예술을 논했던 문필가와 화가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래서 주류사회가 옛것과 우리 것을 홀대하던 시절, 그는 남의 것이나 새것이 아닌 내 것과 옛것의 소중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주종을 불문하고 옛집에서 밤을 보듬으며 술을 나눴다고 한다. 

혜곡(兮谷, 최순우의 호)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개성에서 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개성에서 살았다. 집안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국내 최초의 미술사학자라 할 수 있는 고유섭 선생을 만나면서 박물관 인생이 시작된다. 나라 잃은 식민지 청년의 분노와 고뇌를 그는 고유섭 선생으로부터 고려청자와 각종 불교 문화재에 대한 사사를 받으며 삭혔고, 예산 없는 박물관 서기의 고달픈 일상은 스승과 개성의 이름난 술 개성소주를 나누며 달랬다고 한다. 

우리에겐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그는 한국전쟁 당시 국립박물관의 문화재 유물의 피난과 간송 소유의 국보급 문화재의 북으로의 피랍 등을 막아냈고, 도굴된 문화재의 해외 유출 방지까지 동분서주하며 우리 것과 옛것 지킴이를 자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고유섭 선생이 나눈 개성소주는 어떠한 술이었을까. 개성은 고려의 수도 ‘개경’이었다. 우리나라에 소주가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시점은 몽골(원나라) 침략기. 그리고 개경은 원나라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다. 소주가 유명한 안동과 제주도도 몽골군이 주둔하면서 증류기술이 전래돼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는 술을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고려 당시의 개성소주의 원형을 찾을 수는 없다. 평양과 의주, 해주 등 북쪽지역은 추운 날씨 덕에 막걸리와 청주보다는 이를 증류한 소주를 즐겼고, 그것이 조선시대의 고조리서 주방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최순우 선생이 개성박물관 재직시절인 1930년대에 출간된 <조선주조사>와 당시 발간되던 신문지면을 통해 당시의 개성소주를 확인할 수는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소주는 평양과 의주 등 북쪽지역에서 주로 소비됐다. 그리고 개성은 상업의 역사가 길어 유명세를 떨치던 술도 여럿 기사에 보도되고 있다. 1932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개성의 명주는 ‘송순주’와 ‘송로주’ 그리고 ‘송도주’라고 나온다. 알코올 도수는 30도에서 25도 정도로 생산된 술들이다. 송순주는 소나무의 새순을 따서 원주를 빚어 증류한 술이고, 송로주는 소나무의 관솔을 깎아 술로 빚은 송절주를 증류해서 얻어내는 술이다. 송도주는 개성의 옛 이름 송도를 붙인 일반 소주라고 보면 될 듯싶다. 이와 함께 개성의 특산품인 인삼을 이용한 인삼주도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당시 발간되던 대중잡지 <별건곤>의 기사에 따르면 개성소주는 보쌈김치와 편수(만두의 일종) 등과 단짝을 이루며 애주가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던 것 같다. 개성의 편수는 고기는 거의 넣지 않은 타 지역의 편수와 달리 소 돼지 닭고기와 굴, 잣, 버섯 숙주 등을 넣어 빚은 것으로 고급 요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기사로 미루어보아 개성은 고려의 왕도였고, 조선시대에는 상업물류의 중심이었던 만큼 술과 안주가 한양에 버금갈 만큼 다채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 개성에선 도토리와 옥수수를 주원료로한 송악소주가 생산되고 있다. 최순우 선생이 즐겼던 소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는 술의 존재는 반가운 일이다. 최근 연이은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 기대어 개성소주 마실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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