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문화는 그 사회의 문명 수준을 가늠하는 무형의 기준으로 작용

폭음으로 안전 해치는 사고 급증, 오늘의 눈에 맞는 술 문화 필요

▲ 지난달 고양시가 주최한 대한민국막걸리축제가 올해로 16회를 맞았다. 사진은 성균관유도회 고양시지회가 재현한 ‘향음주례’ 장면 중 일부. 향음주례는 고려 인종 이후 향촌에서의 술 예절을 주도해온 우리 고유의 술문화 중 하나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대홍수를 이겨낸 노아는 물이 빠진 후, 동물들이 실린 방주가 도착한 아라라트 산의 비탈에 가장 먼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창세기>는 전하고 있다. 그 덕에 포도는 성경에 등장하는 첫 농산물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이밖에도 포도나무는 유대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이스라엘로 건너가는 장면에도 등장하는 등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식물이자 조물주가 인간에게 약속한 선물의 상징이기도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선 포도주를 각별한 존재로 대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이자 최초의 고전문학 작품인 <길가메시 서사시>에선 야생의 인간 엔키두가 술(비어)을 마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인간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술은 야만과 인간을 구분 짓는 기준으로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 발전해 온 대표적인 음료다. 

그런데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술은 가지고 있는 장점만큼 단점을 노출하게 된다. 그리스의 극작가 에우불로스가 폭음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는데, 내용은 이렇다.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포도주를 석 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며, 석 잔을 넘길때마다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선 네 잔째에 오면 사람이 오만해지고, 다섯 잔에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여섯 잔이 되면 남과 말다툼을 벌인다는 것이다. 이후부터는 폭력을 수반하게 되는데, 일곱 잔은 주먹질을 부르고 여덟 잔은 가구가 부서지고 경찰이 출동하게 되고 아홉 잔이 되면 광기에 사로잡히고, 열 잔이 되면 기절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사냥 혹은 전쟁에 임하는 전사에겐 생사를 뛰어 넘길 수 있는 한 줌의 용기가 돼 주었고, 씨뿌리기를 앞둔 농부에겐 노동의 피로를 이겨낼 청량제가 됐던 술이지만 부작용으로 인해 공동체의 기본질서를 해치게 되면서 사회는 새로운 규율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 첫 시도는 아마도 최초의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일 것이다. 이 법전에는 선술집 주인은 정치적이거나 범죄의 흔적이 보일 경우 반드시 신고해야 하고 교단에 속한 여성이 술집을 열면 화형에 처하고 술에 물을 타면 술집 주인을 수장시킨다고 적고 있다. 폭음으로 인해 사회의 안녕이 해쳐지거나 제례용 포도주의 사적 유용을 차단해서 건강한 술 문화를 정착시키려 했던 것이다.  

동양에서도 폭음을 경계하는 문화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는데, 공식적인 첫 기록은 <서경>이다. 요순시대의 치세를 기록한 이 책의 〈주고(酒誥)〉편에선 술을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성물로 규정하고 술의 용도는 덕을 기르기 위함이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특히 여럿이 함께 술을 마시는 군음(群飮)은 금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인류는 술을 마실 때 필요한 규율을 만들어왔고, 이를 통해 공동체가 추구하는 질서를 지켜내려 했다. 그런 점에서 술 예절은 그 사회의 문명수준을 가늠하는 무형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향음주례는 지방의 향교와 서원에서 치뤄지는 행사중 중요한 행사에 포함된다. 구한말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던 우국지사들은 이 행사를 이용해 의병을 규합하기도 했으며, 이 같은 이유에서 일제는 1905년 향음주례를 금지시켰다.

우리의 경우도 어려서부터 <소학>을 통해 술 예절을 가르쳐 왔고, 향교와 서원에선 ‘향음주례’를 통해 품격 있는 술 문화를 유지시키려 했다. 

향음주례는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의례 중 하나다. 장유유서를 지키면서 술잔을 돌리는(수작) 문화는 여전히 요즘의 술자리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큰 틀에서 유교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면서 조선 500년을 버텨내게 한 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화가 어느 순간 한반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유교 이데올로기가 퇴색되면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정은 전혀 다르다. 

병탄을 목적으로 1905년 일제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 일제는 조선의 식민 통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양주를 금지시킨 주세령을 반포한다. 이와 함께 일제는 전국적으로 일게 되는 항일의 의지를 강압적으로 꺾어야 했었는데, 그 방편이 향교와 서원에서의 ‘향음주례’를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유생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벌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실제 1895년 기울어가는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전국의 유생들은 향음주례를 핑계로 세규합에 나섰고, 의병활동으로도 이어졌었다.

이처럼 항일의 역사까지 담고 있는 향음주례가 역사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0년대의 일. 하지만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호흡이 가빠진 세대에게 100년 전의 예법은 매력적이지 않았고 설득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음주로 인한 폭력 및 치명적인 교통사고 등이 연일 낙양의 지가를 높이고 있는 시절이다. 음주에 대한 관대한 태도가 문제였다면, 오늘의 시선으로 향음주례를 해석해 새로운 규약을 만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술자리의 품격은 좋은 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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