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소주는 그믐날 도라지와 산초, 백출 등의 약재를 침출시킨 물을 새해 첫날 해가 뜨기 전에 청주에 넣어 끓인 술이다. 달이는 과정에서 약성은 남고 알코올 기운은 많이 사라져 차례후 모두가 음복한 술이기도 하다. 사진은 가양주연구소에서 매해 갖는 도소주술빚기 행사 (제공 : 오서윤)
도소주는 그믐날 도라지와 산초, 백출 등의 약재를 침출시킨 물을 새해 첫날 해가 뜨기 전에 청주에 넣어 끓인 술이다. 달이는 과정에서 약성은 남고 알코올 기운은 많이 사라져 차례후 모두가 음복한 술이기도 하다. 사진은 가양주연구소에서 매해 갖는 도소주술빚기 행사 (제공 : 오서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흐르는 시간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네.”

<논어> ‘자한’편의 한 구절이다. 공자의 말처럼 시간은 그저 흐를 뿐인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간을 나누고 구분하고 의미를 담길 좋아한다. 우연의 연속일 수도 있는 일이 때론 운명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기 일쑤인 까닭도 바로 그러하다.

특히 우리는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나 한 해의 시작과 끝에 더 많은 의미를 담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용하는 달력이 태양력이든 태음력이든 관계없다. 모든 달력에는 1년의 시작과 끝이 있으니, 나름의 방식대로 새로운 시간의 시작과 끝을 각 문화권이 축적한 방식대로 풀어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 공통의 현상에는 절기와 계절의 변화를 수용하는 진화적 특성이 함축돼 있는 듯싶다. 모든 초목을 시들게 하는 겨울의 마른 대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푸른 대지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봄을 축복 속에서 맞이하려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삶과 죽음을 대신 체험하듯 말이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지나간 해는 죽음이며, 새로운 해는 소생이다. 말라버린 대지가 짙은 녹음의 식물로 채워지는 신기한 변화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술에도 같은 이미지가 부여돼 있다. 과일과 곡물로 빚는 발효주는 원재료의 죽음과 새로운 물질의 탄생을 함께 담고 있다. 1년에 한 차례 빚는 포도주의 경우도 양조과정 자체를 삶과 죽음의 드라마틱한 요소로 해석한다.

그래서 포도의 신 디오니소스는 매해 겨울에 죽고, 봄에 소생한다고 여겨졌으며, 주기적인 재생은 죽은 자의 부활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맥주의 경우도 곡물(보리)의 죽음 속에서 술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어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환생의 힘까지 내포한 신으로 받아들여진다.

서설이 길어졌다. 오늘 우리 술 이야기는 절기의 변화, 그중에서도 세모와 세시의 공간에서 마셨던 ‘초주(椒酒)’ 이야기다. 묵은해를 보내는 섣달그믐에 마시는 술이 우선 ‘초주’라 한다. 넣은 재료에 따라 ‘초백주’라고 불리는데, 산초 꽃이나 열매를 넣어 만든 술은 초주, 그리고 여기에 측백나무 잎까지 넣으면 초백주라고 불렸다.

그리고 설날 새해를 맞이하며 마시는 술은 ‘도소주(屠蘇酒)’라 불린다. ‘도소주’는 도라지와 방풍, 산초, 육계 등을 술에 담아 약성을 추출한 술인데, 고려 때의 기록부터 등장하는 술이다.

‘도(屠)’는 ‘잡다’는 뜻을 담고 있고 ‘소(蘇)’는 ‘사귀’. 즉 사귀를 잡는 술이라는 의미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술이다. 이와 함께 집안을 밝히고 청소하면서 낡고 오래된 기운을 제거하고,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제를 하게 된다.

따라서 도소주에는 자연스럽게 ‘진부한 옛것을 제거’하는 의미도 담겨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술의 신화적 기능을 우리 술도 똑같이 담고 있는 것이다.

도소주의 경우는 나이가 어린 사람부터 나이의 역순으로 음복을 하게 돼 있는데,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배려를 담은 술 예법이다. 도소주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문필가 이덕무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중 ‘영처잡고 1’에 보면 “어린아이들은 기쁨이 크겠지만, 어른들은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살아갈 시간이 줄어드니 그 회포가 적지 않다”고 적고 있다.

장승업의 제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화원 안중식은 1912년 백탑을 원경으로 두고 신년 첫술인 ‘도소주’를 마시는 그림을 그린 바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탑원도소회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제공 : 간송미술문화재단)
장승업의 제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화원 안중식은 1912년 백탑을 원경으로 두고 신년 첫술인 ‘도소주’를 마시는 그림을 그린 바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탑원도소회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제공 : 간송미술문화재단)

세시에 도소주를 나누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한 점 있다. 1912년 정월 초하루날 밤의 풍경이란다. 장승업의 제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화원인 안중식(1861~1919)의 그림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가 바로 그것. 선비들의 술자리 가운데 술잔이 있고, 그림의 제목에 ‘도소’가 담겨져 있으니 마시는 술은 당연히 도소주였을 것이다.

그런데 100여 년 전까지 우리 문화와 함께 해 왔던 세시주가 지금은 없다. 간혹 세시에 맞춰 술을 내는 배상면주가에서 수년전에 한정 생산한 바 있지만,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은 그냥 스쳐지나간다. 이런 모습이라면 우리의 세시풍습과 그 속에 담긴 음식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답답할 뿐이다.

도소주 만드는 법
조선의 명의 허준의 비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약재를 담을 수 있는 망을 준비한다. 여기에 백출 36g, 대황, 도라지, 천초, 계심, 호장근 각 30g, 천오 1.2g 등을 넣어 섣달그믐날 저녁에 생수 4리터 정도에 담가 놓는다. 새해 아침 해뜨기 전에 일어나 망을 꺼내고 약성을 침출시킨 물은 좋은 청주 2.5리터와 함께 달인다.

달이는 과정에서 일정량의 알코올 성분이 증발하게 돼, 어린 아이들도 음용할 수 있는 낮은 도수의 음료가 된다. 다 달인 술은 차게 식혀주고 차례주로 사용하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나이가 어린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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