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디지털이라 말하지만 ‘디지털을 위한 디지털’은 무의미
사람의 시선에서 디지털 바라봐야 금융업의 돌파구 마련 가능

KB생명 허정수 대표
KB생명 허정수 대표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길을 걷던 시절, 별은 길의 안내자이자 나침반이었다. 경험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었던 그 시절, 별은 인류에게 등대와 같았다.

배를 타고 움직여야 했던 바닷길도 상황은 마찬가지. 별이 이야기하는 곳을 읽어내야 했고, 그렇지 못하면 ‘잃어버린 별’이 돼 어둠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별은 인류에게 신화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실용적인 안내자로서 기능해왔다.

현생인류가 등장한 이래 대륙을 오가는 긴 여정에서 별은 등대만큼 중요한 길잡이를 해주고 있었지만, 별빛만으로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사고의 위험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평양은 언감생심, 동해와 남해를 배로 항해하는 것 자체가 러시안룰렛과도 같은 때도 있었다. 물론 선박들이 과학기술로 무장한 시대에도 뱃길은 여전히 똬리를 튼 위험덩어리지만 말이다.

뱃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온전히 읽어낼 수 있는 문학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이다. 친구 바사니오를 위해 무역선단을 운영하는 안토니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보증을 선다. 수전노 샤일록이 바사니오에게 돈을 빌려준 까닭은 안토니오의 신뢰도 있었겠지만, 유대인을 경멸했던 당시 베네치아의 풍토에 복수를 계획한 부분도 있었다.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사가 바로 바닷길의 리스크를 나열한 대목이다.

“배는 널빤지고 선원들도 인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땅에는 땅 쥐, 바다에는 물 쥐가 있는 데다 물 도둑과 땅 도둑도 있으니 말이지요. 게다가 파도와 태풍, 암초를 만날 위험도 무시 못 하지요.”

샤일록의 대사에 나타난 리스크들은 모두 바닷길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친구의 보증을 선 안토니오는 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의 배들이 한 척은 북아프리카, 다른 한 척은 인도, 그리고 두 척의 배는 각각 멕시코와 영국으로 항해 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안토니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샤일록과 약속한대로 1파운드의 허벅지살을 떼줘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다.

<베니스의 상인>은 그런 점에서 사실상 보험업의 출생배경을 설명하는 작품이다. 이렇게 해상 무역의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등장했던 보험업이 21세기를 맞이하며 새로운 모색을 준비해야 하는 엄중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지난 세기의 황금기를 거치면서 한계를 드러낸 까닭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만한 대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이는 대안은 모두가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는 ‘디지털’뿐. 하지만 모두가 같은 방향에서 이 디지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올 초 “방향을 잃은 조직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 바 있는 KB생명보험의 허정수 대표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동력을 잃은 배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거나 조류의 흐름에 따라 표류하기 마련이며 별과 나침반이 제시하는 방향을 잃은 배는 더 이상 원하는 바닷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허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디지털을 위한 디지털’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도구를 목표로 착각하게 되면 그 순간 방향을 잃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의 모든 CEO들이 디지털을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디지털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면 이미 방향을 잃게 돼 있다. 사람의 시각에서 디지털을 이해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허 대표의 메시지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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