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들고 떠난 남부로의 연주여행 그린 로드무비
금주법 이전부터 미국서 인기 모은 블렌디드 위스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조연상 등 주요한 상을 받은 영화 ‘그린북’의 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및 남우조연상 등 주요한 상을 받은 영화 ‘그린북’의 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바다를 지배하려는 자들의 꿈은 누구보다도 더 빠르게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갖는 것이다. 속도가 자본의 가치를 지켜주는 최고의 미덕인 시대엔 더욱 그렇다. ‘빠른 배’가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배중에 중국차를 수입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배가 한 척 있다. 최상의 품질을 가진 중국차를 보다 빨리 유럽시장에 가져오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배라고 할 수 있다. 켈트어로 ‘짧은 속치마’를 뜻하는 ‘커티삭’이라는 이름의 배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배가 진수되는 해,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화려했어야할 명성은 빛의 속도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배로써의 운명은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술 이름’으로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그 명성은 유지되고 있다.  

물론 200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싱글몰트 위스키 붐이 불면서 블렌디드 위스키는 과거와 같은 압도적 대세를 형성하지 못한다. 개성 있는 싱글몰트를 찾는 애주가들에 입에 단정한 슈트차림의 블렌디드는 지나치게 격식 갖춰 차려입은 맛 이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균적인 미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개발됐다는 ‘커티삭’이 영화 ‘그린북’을 통해 소개되면서 다시 일반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조연상 등 굵직한 상들을 휩쓴 영화 ‘그린북’은 ‘덤앤 더머’로 데뷔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첫 드라마 장르 연출작이다. 20세기 후반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돈 셜리(마허살라 알리 분)의 자전적 이야기를 아직도 뿌리 깊게 새겨져 있는 흑백갈등이라는 관점에서 풀어쓴 로드무비다.

영화는 1962년, 돈 셜리의 가시밭길 같은 연주여행에서 시작된다. 북쪽의 대도시 투어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음악적 천재성을 알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남부 지역만을 순회하는 일정을 떠난다. 그리고 꽃길을 마다한 채 떠난 거친 가시투성이 길에서 당대 미국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돈 셜리는 이 거친 길을 나서기 전에 입담과 주먹만으로 세상을 살아온 이탈리아계 이민자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를 동행으로 만나게 된다. 백인이지만 교육받지 않아 거칠었던 토니와 지성과 재력, 그리고 천재성까지 겸비한 돈 셜리의 조합은 그들간의 불협화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영향으로 미치면서 우정으로 발전해 간다. 그리고 그 우정은 미국 남부가 보여준 적나라한 인종차별이 계기가 된다.

커티삭은 이 여로에 등장한다. 돈 셜리가 매일 투숙하는 호텔에서 혼자 휴식을 취하면서 마시는 술로 말이다.

커티삭은 미국의 금주법이 한창인 1923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블렌디드 위스키다. 여러 종류의 싱글몰트와 버번을 조합해 미국인들이 즐길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만든 이 술은 금주법이 풀리기 이전부터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금주법이 폐지된 이후 블렌디드 위스키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게 됐고, 돈 셜리가 남부로 연주여행을 떠났던 1960년대가 되면 우리에게 익숙한 시바스 리갈과 듀어스 등과 함께 미국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돈 셜리는 왜 커티삭을 마셨을까. 돈 셜리는 차별을 저항하기 위해 남부 투어를 떠났지만,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폭력 앞에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상황. 공권력조차 같은 틀거리 안에 있었으니, 투어를 마치는 것만으로도 저항은 완성되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돈 셜리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었던 것이 커티삭이었다.

부드러운 술맛만큼 마시고 빨리 취하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선 차별이 사라지는 사회를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있지는 않았을까. 속도로 유명했던 커티삭이었으니 말이다.

요즘 하이볼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의 맥주 생산량을 급격하게 낮출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고, 국내에서도 하이볼 바람이 심상치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도 등장한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은 하이볼의 베이스를 커티삭으로 선택했다. 더워지는 날씨, 자신이 즐기는 위스키에 탄산 등을 넣어 마시는 하이볼 한 잔을 권해본다. 돈 셜리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이 아니니 부담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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