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끊임없는 혁신 통한 진보가 모여서 이룬 결과
사회적 합의로 문제 풀어야, 법률은 마지막 수단일 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혁신과 규제는 양날의 칼이다. 어제까지의 합의 결과가 오늘의 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한계 탓이다. 지구 곳곳에서 혁신은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법률은 혁신을 수용하지 못하고 규제의 칼날을 들이민다. 마치 ‘피투성이 이빨과 발톱의 자연’을 보여주듯이 존재론적인 갈등을 벌이는 것이다. 

200여 년 전의 러다이트 운동이 그랬고 500여 년 전의 인쇄혁명의 낙오자들이 그랬듯, 새로운 기계의 등장은 기득권 세력을 긴장시켰다. 결국 계급간 혹은 직업간 갈등으로 이어졌다.
산업혁명의 결과에 따른 증기기관의 도입이 러다이트로 이어진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의 갈등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5세기 유럽 국가들이 자국어 버전의 성경을 출판하면서 읽게 되는 가톨릭에 대한 저항의 물결을 로마는 읽어내지 못했으나, 오스만투르크는 분명하게 인지한 듯싶다. 그들은 18세기가 될 때까지 인쇄기 도입을 거부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신석기혁명의 과정에서도 정착과 농업을 선택한 부족과 수렵과 유목을 선택한 부족간 갈등은 불가피했다. 생존을 위한 노동의 과정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게 했고 그 결과는 매순간 전쟁 등의 갈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혁신에 의한 진보의 결과가 만들어낸 역사라는 사실이다.

컴퓨터가 등장하는 사례 하나만 살펴보자. 이진법으로 운영되는 컴퓨터의 알고리즘은 수많은 혁신의 결과물이다. 현실의 컴퓨터는 하드웨어 내부에서 이진법을 처리하지만 1960~70년대의 메인프레임이라고 불리던 컴퓨터들은, 오늘날의 키보드나 마우스 등의 입출력 장치 대신 펀치카드시스템으로 명령어를 입력시켰다.

정해진 칸의 구멍유무에 따라 중앙연산장치는 입력 명령어를 해석했는데, 이 기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컴퓨터 개발과정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19세기말 미국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자 홍수를 경험한다. 인구센서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인구 통계를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1880년에 실시한 센서스 통계를 마치는데 5년이 넘게 걸렸으나 1890년에 들어서는 10년의 시간으로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센서스 통계 책임자의 조수였던 허먼 홀러리스는 방직공장에서 사용하는 천동 페이퍼 시스템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이 시스템은 무늬 짜기에 이용되던 방직기다. 종이에 뚫린 구멍에 따라 용수철이 달린 고리가 통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무늬가 자동으로 만들어졌다. 이 시스템을 전기적으로 계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컴퓨터(천공카드 시스템)의 효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방직기가 가능했던 것은 사람을 흉내 내는 기계인형인 오토마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의 엔지니어 자크 보캉송은 드럼을 치거나 플루트를 부는 사람 등을 개발했는데, 그의 명성을 알게 된 프랑스 왕이 그를 비단을 만드는 리옹 지역의 감독관으로 보내게 된다.

그런데 왕족과 귀족들의 입는 값진 옷감을 만들던 리옹 지역의 비단장인 길드에서는 보캉송을 외면한다. 비단을 한 번도 짜보지 않은 사람이 그들의 감독관으로 왔기 때문에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캉송은 그들보다 더 아름다운 비단을 짜는 직조기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개발한 기계가 나귀로 비단을 짜는 직조기였다. 이때 보캉송은 자동으로 무늬를 넣을 수 있는 펀치 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느 날 리옹 지역을 탈출해야 했는데, 장인들이 정성으로 만들었던 비단을 나귀가 짜는 일이 발생하자 한밤중에 리옹의 장인들이 횃불을 들고 그를 죽이기 위해 습격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계와 사람간의 갈등은 산업화 이후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검찰이 ‘타다’의 이재웅 대표를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교통부와 오랜 기간 논의하면서 이뤄진 서비스인데, 6개월간의 수사 끝에 재판에 넘긴 것이다.

공유경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그리고 현재 법률 개정 등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고발이 있다고 기소를 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계층간, 계급간, 직군간 갈등이 존재할 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정치력이지, 법대 앞에서 어제 만들어진 잣대를 들이미는 검찰력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가 무너지거나, 정치력이 실종됐다면 모를까, 정상적으로 사회적 시스템이 가동되는 상황에서 마지막 수단이 등장하면 혁신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모두 범법자가 되고 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