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네일과 나’ 보르도 최고급 와인 200병 마시며 촬영
1969년 쇠락한 영국 중산층 자화상 적나라하게 노출시켜

68혁명이 유럽대륙을 휩쓸고 난 다음해인 1969년 영국은 음울했다. 제국의 이미지를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꿈을 잃어가고 있다. 영화 ‘위드네일과 나’는 그 시절 영국 중산층의 자제들의 고뇌를 담은 작품이며 1987년 개봉했다. 사진은 영화 포스터
68혁명이 유럽대륙을 휩쓸고 난 다음해인 1969년 영국은 음울했다. 제국의 이미지를 사라지고 젊은이들은 꿈을 잃어가고 있다. 영화 ‘위드네일과 나’는 그 시절 영국 중산층의 자제들의 고뇌를 담은 작품이며 1987년 개봉했다. 사진은 영화 포스터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샤토 마고, 샤토 베이슈벨, 샤토 페트뤼. 모두 쟁쟁한 이름의 보르도산 그랑크뤼급 와인이다. 이 와인들을 그것도 작황이 좋아 최고의 해라고 일컬어지는 1945년을 포함해 1947년, 1953년, 1959년, 1961년 빈티지의 와인 200병을 영화 한 편을 찍으면서 2주 만에 모두 마신 일이 1986년에 있었다.

배우이자 작가 그리고 감독이기도 한 브루스 로빈슨 그는 최고급 샤토의 와인을 만끽하며 20세기 가장 화려했던 순간인 1960년대의 마지막을 〈위드네일과 나〉라는 영화에 담아낸다.

중산층 가정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연극 배역을 찾아 나선 20대의 배우 지망생 ‘위드네일(리차트 그랜트 분)’과 ‘나(폴 맥간 분)’ 이 둘은 기초 생계비도 없이 가난하고 남루한 생활을 술과 마약으로 버텨내면서 미래를 도모한다. 하지만 원하는 오디션 결과는 오지 않고 삶에 대한 기대는 조리대에 산처럼 쌓여가는 설거지 안 된 그릇들처럼 볼품없이 무너져간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찾은 위드네일의 삼촌 몬티의 집과 재충전을 위해 돌파구처럼 찾아간 몬티의 별장은 가감 없이 보여주는 위드네일과 내가 처한 오늘의 절박한 현실이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쾌락을 연명하듯 술만 찾는 위드네일은 이 속에서도 여전히 ‘쇠락한 제국’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합리성이라는 눈곱만큼도 없이 방황하는 위드네일의 모습에 실망한 나는 서서히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기 시작한다.

돈도 계획도 없이 시작해 어설픈 촌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탈출은 런던의 남루한 아파트에 도착해 더 꼬여 있는 현실과 맞닥뜨린다. 마약쟁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침실에는 파산을 알리는 퇴거명령서가 함께 잠들어 있고 결국 ‘나’는 현실을 수용한다.

1969년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서 시작된 68혁명의 여파는 여전히 유럽 대륙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또 더는 제국의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영국은 그나마 살만했던 1960년대를 강제정리하면서 보수당 정부에서 노동당으로 정권을 넘기게 된다. 하지만 시스템의 문제를 정권교체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 아는 사실이다.

영화 〈위드네일과 나〉는 그런 1969년도의 영국과 중산층의 자녀에서 패배자로 몰락하고 있는 영국 젊은이들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술과 마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을 술과 마약으로 피하려 했던 젊은 배우 지망생들의 좌충우돌은 그렇게 끝나고 만다.

이 영화의 미덕은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들이 시의적절하게 현실과 맞대응하듯 곳곳에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또한 여타의 영화처럼 소통의 도구로 술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주연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쾌락과 퇴폐의 상징인 술과 마약이 동성애자이자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몬티 삼촌과 마약상에 의해 위드네일과 나에게 전달되는데 정작 화려했던 시대의 종말을 알려주는 선지자도 그들이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한 시대의 종말에 서 있도다”라는 몬티 삼촌과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10년은 끝이 났다”는 마약상의 대사는 촌철살인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 〈위드네일과 나〉는 개봉 당시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좋은 보르도 와인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으며 지금은 잘 숙성된 영국 영화로 인정받는다. 특히 술을 다룬 영화 중에서 가장 잘 만든 영화라는 평까지 붙을 정도다.

영국의 영화소식지인 ‘탑10필름’이 올 1월 초 영국의 선술집(펍)을 다룬 ‘10대 영화’를 선정하면서 이 영화를 빠뜨리지 않고 포함했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펍은 위드네일과 내가 진과 사이다를 걸신들린 듯 한입에 털어 넣었던 ‘마더블랙캡’이다.

친구인 ‘나’는 떠나고 위드네일은 비내리는 런던동물원의 늑대 우리 앞에서 포효하듯 햄릿의 한 구절을 읊는다. 그의 손에는 1953년산 샤토 마고가 들려 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이 와인의 가격은 2000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친구인 ‘나’는 떠나고 위드네일은 비내리는 런던동물원의 늑대 우리 앞에서 포효하듯 햄릿의 한 구절을 읊는다. 그의 손에는 1953년산 샤토 마고가 들려 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이 와인의 가격은 2000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술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나’는 위드네일과 런던동물원 앞에서 헤어진다. 이 자리에서도 위드네일은 이별주로 1953년산 샤토 마고를 들고 서 있다. ‘나’는 사라지고 위드네일은 동물원 울타리 안에 있는 늑대를 바라보며 햄릿의 한 대목을 노래하듯 독백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된 1987년 당시 이 와인의 가격은 2000파운드를 넘어섰다고 한다. 단순 환산하면 300만원 정도. 물론 지금은 그 시세를 셈할 수 없는 가격일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는 감독은 이 술들을 영화 촬영 20년 전에 200파운드 정도의 가격에 샀다고 한다.

소더비 경매에 넘겼다면 큰돈을 쥘 수 있었지만 그는 화려한 봄날의 소풍처럼 값진 와인을 자신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인 이 영화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한다. 200병의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를 마시며 영화를 찍는 기분은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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