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IT맨의 인생 2모작, 연고 없는 연천에서 술도가 열어
줄곧 마시던 소주 못 마시게 되면서 시작된 양조인의 인생

해외여행에서 마신 맥주가 술에 대한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본업인 IT관련 직장을 그만 둔 뒤 막걸리에 천착해 연천에 양조장을 낸 박용수 대표. 사진은 양조장 입구에 서 있는 박 대표 모습
해외여행에서 마신 맥주가 술에 대한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본업인 IT관련 직장을 그만 둔 뒤 막걸리에 천착해 연천에 양조장을 낸 박용수 대표. 사진은 양조장 입구에 서 있는 박 대표 모습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5년 전 안식년을 맞아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거짓말처럼, 소주가 입에 받지 않아 막걸리를 찾았던 IT맨. 통신 및 보안 분야의 솔루션만 26년가량 다루었던 사람이 회삿일마저 뒷전으로 미루고 막걸리 양조에 관한 책을 찾아 읽으면서 급기야 우리 술 교육기관인 ‘막걸리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3년 전 잘 다니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인생 2모작을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연천에서 시작했다. 연천양조의 박용수 대표가 막걸리에 천착하게 된 사연이다.

줄곧 마셔왔던 소주가 입에 맞지 않을 만큼 해외여행에서 그가 받은 술에 대한 문화적 충격은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충격은 술에 대한 기호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고향 진도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 아버지의 술 심부름으로 자주 들렸던 허씨 할머니(진도홍주 기능보유자, 허화자)의 홍주에 대한 기억까지 되살아나게 했다.

일이란 이렇게 기억의 연쇄작용으로 의외의 추진력을 얻게 되는 법. 살아생전의 허씨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제법 가지고 있던 박 대표는 한약방을 했던 아버지의 약술까지 떠올리면서 현실 저편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먼지를 털어가며 모아낸다.

그리고 기억이 끌어낸 추동력으로 막걸리학교의 교육과정과 상업양조를 위한 양조장 교육, 우리 술의 출발점인 전통 누룩 교육까지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고 양조장 터를 찾아 나선다. 양조장터의 기본은 물과 원재료. 즉 물 좋으면서 쌀도 좋은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물도 쌀도 주변 포천과 철원에 밀리지 않는 현재의 양조장이다.

박 대표의 술은 제2의 고향이랄 수 있는 ‘연천’과 자기 자신에서 출발한다. 술의 주재료인 쌀은 연천의 멥쌀이며, 지난해 새롭게 출시한 율무막걸리도 연천산을 사용하고 있다. 누룩 또한 자신이 빚은 누룩과 기성 누룩 4~5종을 섞어서 사용한다. 술의 이름도 아주(我酒)와 연주(戀酒). 아주는 이름 그대로 ‘내 술’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의 속내는 ‘돈 받고 팔려는 술’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마시는 술’이라는 뜻도 같이 있단다.

연주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스러운 술이라는 단순한 뜻도 있지만 자기 돈으로 내고 마시고 싶은 술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그만큼 ‘자기 자신’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술맛을 내겠다는 박 대표의 자존감의 표현일게다.

연천주조의 술은 모두 연천산 농산물이다. 철원쌀만큼 좋다는 평을 듣고 있는 멥쌀과 율무로 각각 빚은 술들이 이 술도가의 대표 술들이다. 왼쪽부터 율무동동주, 연천아주, 율무막걸리, 연천연주
연천양조의 술은 모두 연천산 농산물이다. 철원쌀만큼 좋다는 평을 듣고 있는 멥쌀과 율무로 각각 빚은 술들이 이 술도가의 대표 술들이다. 왼쪽부터 율무동동주, 연천아주, 율무막걸리, 연천연주

현재 연천양조에서 생산하고 있는 술은 앞서 말한 아주와 연주, 그리고 율무막걸리와 율무동동주.

이와 함께 증류소주인 ‘우주(友酒)’까지 모두 다섯 종류를 만들고 있다. 짧은 업력에도 불구하고 라인업은 웬만한 중견 양조장에 밀리지 않는다. 여기에 박 대표는 젊은 소비자와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고 있다. 며칠 남지 않은 발렌타인데이용 기획품으로, 자신이 만든 증류소주를 이용한 칵테일 세트 ‘세킷(Shakit)’을 준비 중이다. 젊은 계층이 찾는 술이어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젊은 감각을 활용한 디자인을 적용하고 있다.

연천양조의 술맛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연주의’다. 인위적인 맛을 넣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술의 단맛을 돋우기 위해 프리미엄 막걸리 양조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찹쌀도 쓰지 않는다. 멥쌀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향과 맛을 최대한 살리되 맛의 균형도 원재료와 양조과정에서 잡아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막걸리의 경우 쌀 고유의 단맛과 신맛 그리고 약간의 탄산감까지 잘 어우러져 있다. 주세법상 약주인 ‘연주’는 막걸리(아주)의 맑은 부분만 취한 전통방식의 청주인데 단맛이 강하지 않아 마실 때마다 술과 안주를 부르는 맛이다. 그래서 다양한 음식과 페어링도 훌륭할 것으로 보인다. 율무 자체가 비싸 생산비가 많이 드는 율무막걸리와 율무동동주는 연천쌀과 또 다른 맛의 세계를 열고 있다. 아주와 연주에서 느낄 수 없었던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술의 주재료인 율무의 맛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연천양조의 술은 박 대표의 말처럼 내 돈 내고 받아 마시고 싶은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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