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수 금융위원장, 지주사 견제 권한 질문에 내놓은 답
정무적 관리 필요한 사안에 시간 벌고 관심 돌리는 효과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19일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2020년 금융위원회 업무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금융위원회)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19일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2020년 금융위원회 업무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금융위원회)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정치적 수사다. 뜨거운 감자처럼 논란을 빚고 있는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를 때,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리더들의 입을 통해 해당 문제에 대한 해법을 듣고자 할 때, 논란을 잠재우고 국면을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리더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집단이 원하는 답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면서 시간을 벌 수 있는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그래서 정무적 관리가 필요한 사안에 단골처럼 따라붙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말이 꼭 정치적 수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썸을 타는 남녀 사이 혹은 사랑을 고백한 연인 사이에도 이 말은 자주 사용된다.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들은 상대방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게 된다.

비즈니스의 현장에서도 이 말은 자주 등장한다. 물건구매를 권유하는 영업맨에게 고객이 취하는 ‘생각해보겠다’도 같은 뉘앙스를 지닌다. 마음속에 떠오른, 혹은 이미 내린 결정사항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경우 이야기를 듣는 청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돼 부정적인 이야기를 건네지 못할 때 우리는 흔히 ‘생각해보겠다’고 말을 한다.

또한, 청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 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보겠다’는 말은 사실상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화법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뜨뜻미지근한 표현을 왜 하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소통과 관련한 거래비용을 줄일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거절의 형식에 따라 상대방이 입게 될 마음의 상처는 물론 상대가 갖게 될 복수심의 크기도 동시에 줄이기 위해서다. 대화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이뤄지지만, 사람들은 감성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이 주는 충격은 예상보다 클 수밖에 없다.

직접적인 거절은 화자를 거만하거나, 냉정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답한 것처럼 보여 가벼운 사람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제기된 문제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다른 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줘 메시지 전체가 부정당할 수도 있다. 또한,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도록 말을 돌리기 위해 ‘생각해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지난주 2020년 금융위 업무계획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금융지주사의 지배구조를 변경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금감원이 견제 없이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은 위원장의 말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메시지는 ‘시간이 필요하다’와 ‘생각해서 답을 구하겠다’이다. 이 말은 제도 개선을 위한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시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할 필요도 있지만, 그럴 경우 발생할 문제의 크기도 만만치 않다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발생한 1조원대 펀드 환매 중단 사태를 일으킨 라임자산운용 사태와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문제 등 금융회사들의 신용을 크게 떨어뜨린 문제들이 발등의 불처럼 현안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감독기관의 견제기능을 쉽게 완화할 수 없다는 생각도 반영된 답변이었을 것이다.

특히 관련 은행의 수장들에 대한 중징계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은 위원장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감독기관의 추후 행보를 예측하려는 이해관계자들에게 속내를 읽히지 않으려는 전략적 행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요즘처럼 고도로 정치화된 환경에서 ‘부정’의 의미로 비치기 때문에, 긍정의 의미를 담은 정치적 수사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은 위원장의 메시지 전략은 성공했다.

금융권 관계자 모두를 자신의 입에 집중하도록 만들었고, 시간까지 벌어둔 셈이다. 그런데 금융지주사의 지배구조를 변경할 수 있을 만큼의 권한을 금융감독원이 행사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래서 시간을 두고 답을 구해야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