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포도주·청주 등 최소 수일에서 3년까지 숙성
술맛에 감칠맛 더하는 것은 시간의 옷 입히는 방법뿐

우리 술은 빠르면 보름에서 길면 세달 정도 걸려 익고 숙성된다. 더운 계절엔 일주일이면 발효가 끝나고 10여일 숙성시켜 마셨고, 겨울엔 100여일 동안 발효와 숙성을 시켰다. 사진은 울산의 복순도가 양조장의 발효실 전경
우리 술은 빠르면 보름에서 길면 세달 정도 걸려 익고 숙성된다. 더운 계절엔 일주일이면 발효가 끝나고 10여일 숙성시켜 마셨고, 겨울엔 100여일 동안 발효와 숙성을 시켰다. 사진은 울산의 복순도가 양조장의 발효실 전경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인류는 숙성한 술을 왜 더 맛있게 느끼는 것일까. 어디 술뿐이랴. 음식도 마찬가지다. 발효된 음식을 먹는 것은 마치 성인으로의 통과의례처럼 받아들여질 만큼 성인이 되면 더욱 찾는 음식이 숙성한 맛을 지닌 발효음식과 음료들이다.

김치나 간장과 된장, 혹은 장아찌류의 음식을 우리는 곰삭아야 맛있다고 말한다. 활어회보다 선어회가 더 씹는 질감이 좋다며 일부러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최근에는 또 고기에 양념이 스며드는 정도의 짧은 시간이 아니라 며칠씩 에이징(숙성)한 육류를 찾는 사람이 늘면서 파인다이닝 업계의 쉐프들의 관심사는 숙성에 모아지고 있다.

술도 마찬가지다. 특히 증류주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위스키의 라벨에는 2012년, 2018년, 2021년의 빈티지가 선명하게 적혀있고, 코냑류의 브랜디들도 군인의 계급장처럼 V.S.O.P나 XO 등의 등급을 명예처럼 새기고 있다.

어디 서양의 술만 그런가. 동양의 술도 숙성의 가치를 제대로 담가내고 있다. 중국의 고가 백주는 최소 5년은 숙성시킨 술이 제품으로 출시되고 있으며 마오타이진의 주류전문점에선 40, 50년 숙성된 백주도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이처럼 더 좋은 맛을 찾는 미식본능은 언제부터 갖게 된 것일까.

진화론적으로 발효와 숙성은 인류가 선택한 최초의 요리다. 불을 이용하기 전부터 인류는 흙을 이용한 차가운 발효기술을 경험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채집 생활을 하다 간혹 육식동물이 남긴 동물의 고기를 얻곤 했는데, 이를 저장 개념으로 흙 속에 보관하면서 숙성의 맛을 알게 된 것이 미식본능의 출발점이다.

이렇게 시작된 발효와 숙성은 각종 요리에 적용됐으며 과일과 곡물을 이용한 발효음료에도 활용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즐기는 발효음료의 대부분은 발효과정이 끝난 뒤 일정 기간 숙성을 거쳐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술도 마찬가지다. 처음 발효 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자연에서 얻기 시작한 에탄올은 인류에게 공동체 생활을 꾸릴 하나의 이유가 돼 주었고, 농경 및 정착 생활을 위한 강력한 명분을 줬다. 처음에는 벌꿀주 그리고 포도주와 맥주가 등장하게 되고 아시아에선 과일과 곡물을 함께 발효시킨 음료가 입맛을 사로잡게 된다.

오랜 시간 인류는 이 발효주들을 음용하면서 미식본능을 일깨우기 시작한다. 요즘 출시되는 맥주는 수일에서 수십 일 동안 저온 탱크에서, 와인은 오크통에서 최소 6개월에서 3년까지 시간의 맛을 입힌다.

또 청주와 일본의 사케도 1년 정도 숙성을 시켜 시장에서 소비자들과 만난다. 이러한 숙성은 우리 술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 만들어 제사와 손님 접대에 이용했던 술들은 대체로 60일에서 100일 정도의 시간을 들여 술을 빚게 되는데, 대체로 한두 달 정도는 숙성에 할애한다. 경조사에 급하게 쓰는 일일주나 시급주 등을 제외하고, 숙성의 맛을 입히지 않고 마시던 술은 없었다.

그렇다면 숙성한 술맛은 왜 더 맛이 있는 것일까. 우선 발효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 등의 거대분자를 당분이나 글루탐산, 지방산 등으로 잘게 자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시간의 옷을 입은 술은 감칠맛까지 더해진다. 오크통에서 익어가는 증류주는 오크의 타닌과 바닐라향이 특유의 구운맛과 함께 느껴지게 된다. 사진은 명인안동소주의 오크숙성실 내부 모습
시간의 옷을 입은 술은 감칠맛까지 더해진다. 오크통에서 익어가는 증류주는 오크의 타닌과 바닐라향이 특유의 구운맛과 함께 느껴지게 된다. 사진은 명인안동소주의 오크숙성실 내부 모습

따라서 큰 분자일 때는 맛을 느낄 수 없었던 물질들을 발효과정을 거친 후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술도 마찬가지다. 탄수화물과 포도당들을 단당류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알코올로 분해하는 효모 덕에 알코올과 당을 같이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숙성의 맛이 더해지면 술의 세계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숙성은 발효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저분자 물질을 없애는 기능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극적인 물질들은 효모가 다시 먹어치우거나 산소와 만나 산화되면서 사라지는 것이다. 또 다른 분자와 결합하면서 온화한 풍미의 분자로 안정화되기도 한다. 즉 시간의 외피를 더한 술은 거친 면은 덜어내고 향미 성분은 더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술을 긴 시간 숙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졸레 누보처럼 2~3개월 숙성시킨 뒤 출시되는 술이 있는 반면 보르도나 브루고뉴의 카베르네 쇼비뇽이나 피노누아 품종등은 길게는 3년 정도 숙성시킨다. 심지어 병입 이후에도 십수년 뒤에 열어야 단단하게 뭉쳐진 와인의 맛과 향이 열리는 술들도 있다.

그런데 우리 술 중 유일하게 숙성의 맛을 담지 못한 술이 있다. 서민들의 가벼운 주머니를 위로하듯 값싸게 밥상머리에 오르고 있는 대도시의 막걸리들이 그렇다.

전통주와 민속주, 지역특산주로 분류돼 애주가의 손길에 오르는 술들은 모두 일정 기간 숙성돼 술맛과 함께 감칠맛을 가져다주지만, 막걸리는 7~10일 만에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 때문에 숙성을 거칠 시간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좋은 술을 위해 막걸리에게도 숙성의 시간을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본의 눈으로 술을 보면 술은 그저 하나의 상품이다. 언제까지 그런 눈으로 볼 것인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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