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와 파멸 양면 모두 갖추고 있는 야누스 같은 존재
실패에 대한 두려움의 사이에서 균형 있게 판단해야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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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성취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다. 그 성취감과 함께 우리를 어떤 목표로 이끄는 감정이 있다. 바로 야망이다.

야망은 리더십의 두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성공으로 이끌기 위한 긍정의 모습과 파멸로 이끄는 부정의 모습 모두가 야누스처럼 야망이라는 것에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야망은 최고의 동기부여제일 것이다.

부와 권력, 평판, 성공 등의 단어처럼 앉아 있어서는 도저히 영접할 수 없는 대상들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야망이기 때문이다.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위험을 취하지 않으면 긍정의 성과도 가질 수 없는 야망은 그래서 현대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비품 같은 덕목이 됐다.

이 야망과 관련, 가장 먼저 떠오르는 캐릭터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일 것이다. 내란을 일으킨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 능력만큼 왕(덩컨)은 작위를 내리지만, 귀환길에서 만난 마녀들의 부추김에 넘어가 야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추락한 인물이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맥베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능력이 향상될수록, 성과의 크기가 커질수록, 야망도 비례해서 커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주변에서의 평판까지 따라와 주면 야망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제 몸집을 키워간다.

그런데 문제는 파국을 경험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사후적으로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실패의 쓴맛을 본 뒤에야 겸손해지고 그 결과, 위험에 대한 감수성도 민감해진다.

이런 맥베스의 모습이 아직도 이 희곡이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와 가장 근접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어서, 오만에 빠지지 않으려는 경계석처럼 맥베스라는 거울에 우리를 비추고 있다.

심지어 과학적 근거가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메시지에도 현혹되기도 하는, 그래서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민낯까지도 그에게는 천연덕스럽게 갖춰져 있어서, 그를 연민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맥베스의 잘못된 판단이 스스로의 한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성공하는 리더는 조직에 정확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잘못된 신호는 오판을 부르고 오판의 결과는 참혹하다. 특히 분류되지 않고 걸러지지 않은 정보가 많은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그에 대한 논공행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스코틀랜드 귀족과 백성들의 평판은 이미 그를 지도자급으로 올려놓았다. 이 상황에서 덩컨 왕은 실수를 저지른다.

아직 장자 계승 전통이 세워지지 않은 스코틀랜드에서 “짐은 왕위 계승권을 짐의 맏아들, 맬컴에게 주려 하오. 이제부터는 그를 컴벌랜드 공으로 부르겠소”라고 밝힌다. 전 국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안정적인 무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경쟁자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결국 맥베스는 덩컨과 그의 아들 모두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만다. 그렇다면 맥베스의 지닌 야망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우선 반란세력을 무력화시킨 그의 무력일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초자연적인 마녀들의 예언이다.

물론 맥베스는 듣기 좋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100% 확신하려 하진 않았다. 승진과 주변의 평판에만 만족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야망은 실체 없이 몸뚱이를 키워가는 가혹한 생물과도 같다.

그래서 권력을 향한 야망은 이기적이면 안 된다. 자신의 성공에만 집착하는 이기심으로 권력을 이해해서도 안 된다. 바람직한 야망은 전 조직원이 목표를 공유하고 그 성과도 같이 나눌 수 있을 때만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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