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맬 수 있는 여유 있어야 부족한 지혜 채울 수 있어
각자 경험 찾아보면 지름길이 외려 잘못된 경우 많아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길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헤매면서 걷다 보니 그 흔적이 남게 되고, 그 흔적을 찾아 또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다 보니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길은 만들어지고 또 지워지면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길에 관한 생각은 루쉰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찾을 수 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있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말처럼 걷다 보면 길이 되는 이치는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각자 정한 목적을 두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치열하게 살아간다.

때로는 남들이 남겨둔 흔적을 삶의 지표로 삼고 그 길을 좇는데 시간과 정성을 아끼지 않기도 하고, 또 때로는 흔적도 없는 길에서 방황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데 온 인생을 걸기도 한다.

어느 길이 더 좋은 길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잣대는 없다. 먼저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을 쫓으면서 얻는 것과 온전히 혼자 좌표를 찍어 헤매면서 얻는 것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대상들이다.

각각의 길이 지닌 의미가 서로 다른 만큼 무엇이 맞고 틀림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혼자 헤매기보다 앞서 걸은 사람의 족적, 즉 지름길을 찾아 나서려 한다. 그 선택이 더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참고서와 자기계발서에 길들 수록 그런 경향은 강화된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원하는 목적을 더 빨리 달성하기 위한 마음이 길을 찾는 비용을 줄이는데, 더 신경 쓰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지름길이 꼭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헤매면서 길을 찾아 나설 때 더 많은 성취감을 얻곤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무한한 범위의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헤매고 난 뒤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는 역설. 참 재밌는 삶이다. 그런데 소로는 그 역설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든 넋을 잃은 상태에서 깨어나든 간에, 정신이 들 때면 언제든 다시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위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길을 잃기 전에 자신이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지 깨달아야 세상과의 관계를 확인하면서 길을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연전에 출간된 철학사 책 중에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쓴 《세상을 알라》라는 책이 있다. 3부작 중 첫권이며 현재 두 번째 책(《너 자신을 알라》)까지 출간돼 있다.

이 책에서 프레히트는 “우리는 많은 점에서 예전보다 더 똑똑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지혜로워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그리고 비대면 기술 등 우리는 과거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신적인 기술을 갖고 삶을 새롭게 재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무척 똑똑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삶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길을 헤매기 일쑤다. 같은 책에서 프레히트는 로베르트 무질의 말을 인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헤매면서 나아간다!”라고.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라고 적고 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하겠다고 하느님에게 말을 건네자 하느님이 한 말이다.

이처럼 방황은 인간의 전유물이다. 그래서 길을 나설 때 필요한 것은 나침반과 방황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다. 어떤 일이든 헤맬 수 있다는 여유가 있어야 길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부족한 지혜가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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