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 속에 의료계 파업, 그리고 태풍까지 와
국민 모두 힘겨운 시절, 서로 경청하는 미덕 발휘하자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있다. 7년 전에 생을 달리한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했으니 참 오래된 영화다. 물경 20년이 넘은 것이다.

이 영화는 천재이지만 어린 시절 양아버지의 폭력으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살아온 윌 헌팅(맷 데이먼 분)이 주인공이다.

불우했던 만큼 대학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사건은 그가 맡은 건물에서 시작된다. 이 대학의 수학자들도 끙끙거려야 하는 문제를 그는 식은 죽 먹듯 풀어낸다.

‘낭중지추’처럼 그는 몇 차례 숨은 천재성을 드러낸다. 수학에 관한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역사와 법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그는 제도권의 대학생들을 이겨 먹듯 요리해낸다.

영화의 갈등 관계는 그의 수학적 재능을 발견한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 분)가 그를 수학자로 키우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윌 헌팅의 마음은 철옹성이다.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일 자체를 금기로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만의 생존법이었다.

램보는 여러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그의 마음을 열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대학 시절 한 때 경쟁자였던 숀(로빈 윌리엄스 분) 교수를 찾아간다.

여기서부터 윌 헌팅과 맥과이어의 갈등과 대결이 펼쳐지면서 타자에 대한 이 영화의 메시지가 펼쳐진다.
 
처음 윌 헌팅이 마음의 빗장을 연 것은 한 차례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있고 난 뒤 숀이 호수를 바라보면 윌 헌팅에세 낮으로 톤으로, 그러나 설득력 있게 말했던 이 대사일 것이다.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타인을 너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

쉽지 않은 일이다. 20대 청년에게 타자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다.

그 사랑법은 삶에서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20대에게 상실감은 원초적으로 부정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숀과 윌 헌팅은 이 말을 계기로 조금씩 변화한다. 그리고 윌 헌팅이 울면서 무너지듯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을 때 숀은 그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토닥이면서. “네 잘못이 아니야.”

코로나19 방역, 그리고 의료계 파업 등 설상가상처럼 사회문제가 커져만 간다. 그 사이에 역대급 태풍은 쉬지 않고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문제만 가지고도 벅찬데, 공공의대 문제를 두고 극한 갈등까지 벌이고 있으니 국민은 아얏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힘들어하고 있다.
 
8.15 광복절 집회에서 반정부의 목소리를 높인 세력이든, 공공의료를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파업이든 모두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얻고 싶은데, 얻지 못했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은데 빼앗길 것 같은 느낌.

이런 생각들이 갈등을 증폭시킨다. 여기에 진영논리가 보태지면 중도가 사라진다. 극한 갈등으로 치닫기 때문에 중도는 회색이 되어 부정당하기 일쑤다.

그런데 살면서 가장 고마운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다. 일러주고 가르쳐주는 선생이나 교주가 아니다.

그저 들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가 마지막에 인정받는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 교수처럼 말이다.

“남에게 친절하라. 그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현재 그들의 삶에서 가장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플라톤이 한 말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우울증의 시대를 사는 오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삶에서 가장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이젠 서로 들어주자. 그럴 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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