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섬에 허브향 가득 담은 ‘건지감자껍질파이북클럽’
다른 술 도움받던 술에서 이젠 프리미엄급으로 급성장

2018년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지배하의 건지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애를 회복하는지를 제대로 살려준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은 영화 포스터 (사진 : 넷플릭스)
2018년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지배하의 건지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애를 회복하는지를 제대로 살려준 영화이기도 하다. 사진은 영화 포스터 (사진 : 넷플릭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섬 중에 ‘건지’라는 이름의 섬이 있다. 이 섬은 네덜란드보다 인구밀도가 높고, 영국과 프랑스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섬이다.

영국해협, 그중에서도 프랑스에 가까운 섬이지만,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100년 전쟁에서 대륙의 모든 땅을 빼앗기면서도 이 섬(체널 제도)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영국 땅으로 남은 곳이다.

기후가 좋아 영국의 대표적인 피한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이 섬이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건지섬도 독일군의 손에 들어간다.

1945년까지 이 섬은 암흑 그 자체였다. 영국 국적의 섬이었으니 더 큰 탄압이 있었고, 심지어 식량까지 약탈당해 이 섬의 주민들은 숨죽이고 감자로 연명해야 했다.

그 시절, 전쟁으로 인간애가 사라진 그 시간을 이야기로 담아낸 영화가 있다.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과 동명의 영화가 그것이다.

서간으로 이뤄진 메리 앤 섀퍼와 애니 배로스 원작의 소설을 영화의 서사구조로 바꿔, 지난 2018년 개봉한 이 영화(마이크 뉴웰 감독)는 독일군 점령 기간, 우연히 만들어진 독서클럽을 소재로 영국의 유명 작가 줄리엣 에쉬튼(릴리 제임스 분)과 독서클럽 맴버 간 연대 의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은 아니지만, 전쟁의 여파와 지배자의 탄압으로 건지섬의 주민들은 인간애를 잃어간다.

이 가운데 잘 숨겨놓은 돼지 한 마리를 이웃과 나누면서 전쟁이 가져온 온갖 부정적인 요소를 잊고 따뜻한 인간애를 회복하는 것이 이 영화의 실제적 출발점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먹을 것보다 더 굶주렸던 것은 사람들과의 소통이었다는 점과 연대 의식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오븐에 구운 돼지구이와 건지섬 특산의 ‘진’을 마음껏 즐기고 통행금지 시간을 지나 헤어지면서 독일군의 검문에 걸려 독서클럽으로 위장해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후 독서클럽에서는 문 닫힌 도서관에서 먼지에 갇혀 있던 책들을 꺼내 독회를 하면서 자신들만의 작은 파티를 이어나간다.

그 자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은 역시 ‘진’이었다. 이 술은 독서클럽 맴버인 이솔라 프리비(캐서린 파킨슨 분)의 작품이다.

문샤인처럼 허가를 받지 않고 집에서 몰래 만든 밀주다. 그런데 이 술이 독서클럽의 모임은 물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건지섬을 찾은 작가 줄리엣과 모임을 연결하는 고리가 돼준다.

주니퍼베리(노간주나무 열매)와 고수, 각종 야생초가 천장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이솔라의 집은 ‘진’ 고유의 허브와 홉, 그리고 감귤 향 등이 영화 화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영화 속에서 ‘진’은 존재감을 뚜렷하게 뿜어내고 있다.

‘진’은 보통 이 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재료를 이용해 칵테일을 하는 술로 알려져 있다. 마티니나 리키, 민트줄랩 등의 술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런 술들은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훌륭하게 소품으로 활용돼왔다.

하지만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진 자체를 즐기는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 술은 저평가받아 왔다. 어쩌면 이 영화가 ‘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최초의 영화일 수 있을 것 같다.

‘진’은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져 영국에서 꽃이 핀 술이다. 영국으로 건너와 18세기 초중반 ‘진 광풍’이 일어나고 런던 등에서 사회문제로까지 번질 만큼 생산량과 소비량이 급증하기도 했던 술이다.

이렇게 출발한 술이어서 진은 대체로 저평가받아 왔고, 20세기 후반 이후부터 프리미엄의 범주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드카에 주목하던 미국 소비자들이 진의 풍미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고급스럽게 증류한 진이 늘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21세기 ‘진’은 더는 계급에 갇혀 있는 술이 아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서 등장하는 술처럼 다른 부재료 없이 그 술만으로 소통의 도구가 돼 연대감을 형성하는 술이 돼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니퍼베리를 넣어 고급스럽게 증류한 ‘진’이 생산되고 있는 것을 아는가. 이처럼 ‘진’은 국경을 넘어 이 땅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로 만들어지는 우리 술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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