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산 제임슨·기네스로 빚는 ‘아이리시 카 밤’
양주폭탄주와 달리 노동하는 사람들의 소폭 같은 술

소방관들의 애환을 담은 폭탄주 ‘아이리시 카 밤’이 등장하는 영화 (래더 49)의 포스터
소방관들의 애환을 담은 폭탄주 ‘아이리시 카 밤’이 등장하는 영화 (래더 49)의 포스터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아무렇지도 않게 흔히 마시지만 이름만으로 볼 때 가장 섬뜩한 술 이름은 폭탄주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이 술은 이름만큼 마시는 방법도 폭력적이었다. 그런데 폭탄이라는 이름의 술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의 위스키 제임슨과 아일랜드의 국민 맥주 기네스, 여기에 리큐르인 베일리스를 섞어 마시는 ‘아이리시 카 밤(car bomb)’, 베일리스 대신 커피 리큐인인 깔루아를 넣은 ‘벨파스트 카 밤’ 등의 술은 이름에서부터 술이 지닌 정체성은 물론 효과까지 진하게 느끼게 한다.
 
‘카 밤’ 즉 차량 폭탄은 테러를 연상시키듯 두 술은 북아일랜드의 무장테러조직 IRA와 영국 정부가 갈등했던 시기의 차량 폭탄 테러를 패러디한 술 이름이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주도, 즉 두 술 모두 만들어진 곳은 아일랜드다.
 
이외에도 일본 맥주에 사케를 넣은 ‘사케 밤’, 클럽에서 젊은 애주가들이 많이 찾는다는 예거마이스터를 넣은 ‘예거 밤’ 등의 폭탄주도 존재한다.

이처럼 무서운 이름이 붙여진 것은 기주(基酒, 중심 술)에 다른 술을 떨어뜨려 섞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같은 방식으로 제조하는 술 중에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사용하는 ‘뎁스 차지(depth charge)’가 있다. 뎁스 차지는 구축함이 잠수함을 잡을 때 사용하는 폭탄인 폭뢰를 의미한다.

‘밤샷(bomb shot)’처럼 다른 술을 기주에 넣어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뎁스 차지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폭탄주가 미국에선 ‘보일러 메이커’로 불린다.

노먼 맥클린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만든 〈흐르는 강물처럼〉(1992년 개봉)에서 형 노먼(크레이크 셰퍼 분)과 아우 폴(브래드 피트 분)이 기성에 저항하듯 나눈 술로 등장한다.

오늘 술 이야기를 나눌 영화는 재난 영화인 〈래더 49〉(2005년 개봉)다. 제이 러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소방소장 케네디(존 트라볼타 분)와 소방대원 잭 모리슨(호아킨 피닉스 분)이 화재 현장에서 경험하는 극한의 상황들을 소방관의 시선에서 다룬 영화다.

앞에서 폭탄주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것을 보고 눈치챘겠지만, 이 영화에는 소방관들의 애로를 달래주는 술로 폭탄주가 등장한다.

‘아이리시 카 밤’이다. 새내기 소방관 잭의 애인 린다(재신다 바렛 분)가 결혼 전 동네 펍에서 잭의 동료들과 술을 나누며 연거푸 마셨던 술이다.

 술의 성능(?)을 잘 알고 있던 케네디 서장은 만류하지만, 린다는 이 술을 마시고 호되게 술의 후과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 이름이 붙은 것일까. 앞에서 한 설명처럼 20세기 후반기 아일랜드의 비극적 상황을 그 나라 술로 조합한 한 바텐더가 북아일랜드의 비극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풀어내려고 만든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술은 생명을 위협하는 화마와 싸우며 사람을 구조하고, 불을 진압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의 소방관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피로를 달랬던 술로 이 영화에서 그려진다.

대형곡물창고 화재 현장에서 주인공 잭은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추락하게 된다.

케네디 서장 등이 필사적으로 그를 구조하려 하지만, 아이리시 카 밤이 지닌 술의 위력만큼 화마는 그를 비극적으로 몰아간다.

끝내 구조되지 못했지만, 그의 회상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그림은 섬세하게 그려진 한 소방관의 성장기다.

그런데 이 술들과 우리의 양주 폭탄주를 혼동하진 말자. 출발지점과 시선 자체가 다르다.

부패한 정치인과 기업인이 국민은 ‘개돼지’라고 폄훼하면서 그들만의 기득권을 위해 결탁하는 모습을 줄도 백도 없는 검사가 고발하는 우리 영화 〈내부자들〉(2015년 개봉)에 등장하는 양주폭탄주는 권력과 부와 명예를 좇는 부나방들의 술이었다면, 우리가 즐기는 소주폭탄주와 보일러메이커, 그리고 아이리시 카 밤은 진한 노동을 마치고 그날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마셨던 서민들의 술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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