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백안시할 때 무에서 유 창조하듯 반도체 일궈
고대 신화 속 영웅서사처럼 ‘변신 프로젝트’ 지속 제안

(사진: 삼성)
(사진: 삼성)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영면에 들었다. 긴 투병 생활이었다.

바삐 흐르는 시간 탓에 존재감마저도 느낄 수 없었다. 부고 기사가 뜨기 전까지 모든 사람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고 이건희 회장의 부고 기사는 그 자체로 존재감이 컸다.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을 상기시키며 묵직한 무게로 되살아나 우리의 정신을 장악했다.

불량 백색 가전제품,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애니콜 휴대전화기 등에 대한 화형식은 당대를 살았던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고 ‘부인을 빼고 다 바꿔라’와 ‘정치는 4류’라는 메시지는 삼성이 주도하려 했던 ‘변신 프로젝트’를 한눈에 확인시켜줬을 만큼 지금까지 주목받는 어록으로 남았다.

그렇게 낯설게 다가왔던 당시의 이벤트와 도발적인 메시지가 오늘은 남다르기만 하다. 어쩌면 그 모든 행위가 신화로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다 바꿔라’와 ‘정치는 4류’라는 어록은 변신에 대한 절실한 요구가 담겨있는 글이다.

변신은 신화가 추구하는 질서의 핵심 사건이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는 조직의 생각도, 시스템도 바꿀 수 없을뿐더러 사고체계도 변경할 수 없다.

그래서 절박했던 이 회장은 극단적인 어법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아닐까.

가전제품과 휴대폰에 대한 화형식도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화적 얼개를 담고 있다. 화형은 존재에 대한 거부다.

불태움으로써 기존 질서와 제품은 사라지게 된다. 사라짐은 필요 때문에 다시 생성의 길에 나선다.

시대의 요구에 맞는 생각과 제품은 만들게 되는 것이다. 즉 신화에 담겨있는 영웅의 귀환 스토리를 화형식에 제대로 녹여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도시국가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는 절친 엔키두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 그 자체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사막을 찾는다. 현실 속의 사막은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는 장소다.

당연하게도 하루하루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길가메시는 고군분투해야 했다.

 심지어 죽음을 경험하기 위해 사자들만이 입장할 수 있는 지하의 세계를 방문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이 변신을 모티브 삼아 하데스(지하 세계)를 찾았던 것처럼 길가메시는 지하 세계를 경험하고 난 뒤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영생불사의 헛된 꿈을 내려놓고 새로운 인간으로 우루크에 복귀하게 된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오딧세우스는 고향 이타케까지 10년에 걸쳐 귀향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호메로스는 《오딧세이아》에서 오딧세우스가 만나는 바다를 ‘추수할 수 없는 바다’로 표현한다.

신비의 섬 오기기아에 사는 바다의 요정 칼립소에게 잡혀 여러 해 동안 고향에 가지 못하는 오딧세우스가 넋 놓고 바라본 바다도 ‘추수할 수 없는 바다’였고, 포세이돈의 아들인 괴물 퀴클롭스를 설명하면서도 ‘추수할 수 없는 바다’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는 바다에 대해 왜 이토록 가혹한 평가를 했던 것일까.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는 생산할 수 없는, 그래서 죽음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역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죽음이 가까워짐을 뜻했다.

그런데 이 바다에서 10년 동안 방황했던 오디세우스는 그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죽음의 영역에서 겪은 다양한 바다의 모습이 그에게 수많은 지혜를 체득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지난주 우리 곁을 떠난 고 이건희 회장의 변신 프로젝트도 죽음의 땅 ‘사막’과 불모의 공간 ‘바다’에서 일궈낸,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 들이었다.

세계가 백안시할 때 우리가 지금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영웅의 귀환 스토리를 믿고 변신에 합류한 덕이다. 20세기 말과 21세기의 첫 10년의 시공간에서 그가 펼쳐낸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신화로 쓰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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