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빚고 남은 찌꺼기 증류한 그리스의 대중주
영화 주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 같은 술맛

1960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제33회 미국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그리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영화 포스터  (사진 = 네이버 영화)
1960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제33회 미국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그리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영화 포스터 (사진 = 네이버 영화)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영화가 시작되면 그리스의 전통악기 ‘부주키’가 화면 가득 채워지고, 제33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주제가상을 받은 주제음악이 흐른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뒷골목 직업여성인 주인공 일리야(멜리나 메르쿠리 분)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며 등장한다.

허물을 벗듯 달려가며 옷을 벗어 던지고는 이내 수영복 차림이 돼 항구 앞바다로 뛰어드는 여주인공. 조선소 노동자들의 시선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칠세라 그녀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지난 1960년에 개봉(국내 개봉은 1966년)한 그리스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의 도입부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멜리나 메르쿠리의 연기가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큼 이야기는 그녀를 중심에 두고 흐른다.

여기에 한 사람의 이방인이 등장한다. 미국의 물질만능주의에 염증을 느낀 남자주인공 호머 트레이스가 인생의 해답을 찾는다며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 여행에 나선 것이다.

영화는 곳곳에 상징과 메타포를 심어놓았다. 주인공들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호머는 호메로스의 영어식 이름이고, 일리야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땅 이름 중 하나다.

즉 고대 그리스의 대문호 이름과 고대 그리스의 옛 지명을 등장시켜 제대로 된 그리스 이야기를 하겠다는 포석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지성은 지칠 수 있지만, 대지는 변하지 않고 굳건하다는 영화의 뒷이야기까지 이름에 담고 있다.

항구의 선술집 ‘타베르나’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술을 즐기고 있다. 낯선 이방인 호머가 등장하자, 초면임에도 이방인을 환영하는 술을 건넨다.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은 호머는 호의를 정중히 물리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즐기는 술의 이름을 묻는다.

“우조. 남자라면 당연히 마실 줄 알아야 하는 술이다” 웨이터의 답이다.

카페에서 술을 즐기는 그리스 사람들이 관광을 온 미국인 호머 트레이스에게 그리스 술인 우조를 권하고 있는 스틸 사진
카페에서 술을 즐기는 그리스 사람들이 관광을 온 미국인 호머 트레이스에게 그리스 술인 우조를 권하고 있는 스틸 사진

커피를 주문한 호머의 입장에서 우조는 요즘 말로 ‘인싸’와 ‘아싸’를 구분하는 술이다.

카페는 부주키 음악으로 인해 흥에 가득하고 신명 난 여르고(부두노동자)가 우조를 마시는 족족 유리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린다.

술잔이 깨지는데도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이방인만이 낯선 풍경에 움츠린다.

춤을 추는 모습에 답례로 친 호머의 박수는 구걸하기 위해 춤을 춘 것처럼 보였다고 생각한 요르고를 도발하게 된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도 자신이 흥이 날 때만 춤을 췄고, 산토르를 연주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리스를 책으로 읽은 호머는 그리스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의 화법에 익숙하지 않다.

이처럼 이방인이 그리스를 접하면서 영화는 그리스 신화(피그말리온 신화)와 삶의 이야기를 보태며 진행된다.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은 지금까지 설명한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리스는 물론 영화의 핵심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즐기는 술과 음악, 그리고 그리스인의 열정과 자유로움까지 말이다.

남자주인공을 맡은 줄스 다신이 각본을 쓰고 메가폰까지 잡은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다.
그런데 이 작품이 대박을 터뜨린다. 상복도 많아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아카데미에선 주제가상을 수상한다.  

그럼 이제 영화 속 술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남자라면 당연히 마셔야 한다는 술 ‘우조’는 포도주를 양조하고 남은 찌꺼기를 증류한 술이다.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술이 이탈리아의 대중주 그라파와 터키의 라키라는 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모두가 우리의 소주처럼 일상의 술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나’가 크레타에서 맡은 그리스의 향기는 개가 짖고 닭이 우는 가운데 대기에 퍼져 있는 치프로 냄새였다. 바로 치프로가 포도의 찌꺼기를 증류한 술이다.

여기에 독특한 향을 지닌 아니스 등의 향료를 넣어 침출한 술을 우조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조에 들어있는 아니스의 아네톨 성분은 물을 만나면 뿌연 우윳빛을 보인다. 그래서 터키 사람들은 ‘라키’를 ‘사자의  젖’이라고 부른다.

그럼 술맛은 어떨까. 그리스와 터키에선 우리의 소주처럼 대중적으로 즐기는 술이지만, 우리에게 우조는 호불호가 극명한 술이다.

익숙하지 않은 아네톨 향이 목넘김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술에 꿀을 타서 마시기도 하는데 그 술을 ‘라코멜로’라고 부른다.

영화에서 우조는 사람들이 모여 술 마시는 장면마다 등장한다.

이성이 감성을 누르지 못하고, 계산된 정성은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는 영화의 결론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다.

익숙하지 않은 술맛이지만 우조도 영화의 주제처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술이 될게다. 결국 낯섦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만남을 늘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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