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부 안소윤 기자
금융부 안소윤 기자

최근 브이로그(Video+Blog, 영상으로 쓰는 일기) 형식을 이용해 다양한 직장인의 생활을 소개하는 한 지상파 예능 프로에서 9년 차 은행원의 근무 일상이 방영됐다.

모 은행 본사 연금사업부 소속임을 밝힌 해당 은행원은 영업점에서 실행될 이벤트 준비 업무부터 회의하는 동안 잔뜩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 및 메신저 등 소소한 일상까지 공개하며 직장인으로서의 애환과 공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퇴근 과정에선 의아함을 자아냈다. 해당 은행원은 퇴근 준비를 하던 중 다른 부서로부터 갑작스러운 업무 처리 요청 전화를 받았다. 업무용 메인 PC가 퇴근 시간에 맞춰 이미 강제 종료된 후였다. 이 은행원은 책상 밑에 있던 여분의 PC(노트북)을 꺼내 일을 마무리했다.

해당 은행원은 방송에서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며 PC오프제에 대해 “참 좋은 제도”라고 말하면서도 말미에는 “문제는 (일해야 하는데) 컴퓨터가…”라며 말을 줄였다.

지난 2017년 은행권에 도입된 PC오프제는 퇴근 시간이 지나면 업무용 PC가 자동으로 꺼지면서, 추가 근무 등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직원들의 주 52시간 근로 및 휴식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됐다.

하지만 방송에 비춰진 은행원의 모습은 PC오프제 무용론을 상기시킨다.

그동안 현장에선 PC오프제를 두고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해야 할 업무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퇴근 시간에 맞춰 PC가 꺼지다 보니 조기 출근하거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거다. 업무는 줄지 않은 채 시간 외 수당만 받기 힘들게 됐다는 볼멘소리까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근무시간 외에 업무용 PC를 이용할 수 있는 ‘PC오프제 예외 승인제’가 있긴 하지만 번잡한 과정과 여러 승인을 받아야 하는 윗선 눈치에 장시간 특근 외에는 신청하기 어렵다.

방송을 통해 확인된 모습만 봐도 퇴근길 갑작스러운 업무 요청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PC오프제 예외 승인을 사전에 받아두기란 현실성이 부족하다.

직원의 ‘워라밸’을 위해 도입된 제도라 할지라도 유명무실하고, 오히려 직원들의 불만을 사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면 좋은 취지마저 겉치레로 퇴색되는 법이다.

제도의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단 은행원들의 ‘저녁이 없는 삶’이 시스템이 아닌 조직 문화의 문제에서 비롯됐음을 인지하는 게 더 큰 의의가 있어 보인다.

책상 밑 여분 PC에서 드러난 현실은 근로 시간을 강제로 줄이는 것보다 실적 중심의 문화와 할당제, 과도한 업무량을 손질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은행원들을 몰래 일하게 만들지 않고, 실질적인 휴식과 업무 효율성을 보장하는 은행만의 대안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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