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부터 준비돼 있어야 제철에 꽃 피울 수 있어
전국4매 ‘선암매.고불매.화엄매.율곡매’ 기풍 남달라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에서 꽃을 활짝 피운 흑매. 3월 중순 꽃이 만개할 즈음엔 웅장한 각황전 건물이 외려 소박해보인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대웅전 사이에서 꽃을 활짝 피운 흑매. 3월 중순 꽃이 만개할 즈음엔 웅장한 각황전 건물이 외려 소박해보인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봄꽃이 한창이다. 3월 들어 기온도 평년보다 높아져, 이어 달려야 할 꽃들이 동시에 펴 백화만발이다.

순서가 뒤바뀌는 일도 예사다. 벚꽃이 목련을 앞서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목련과 벚꽃에 밀리기도 한다.

그런데 꽃 보는 사람들에게 그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겨우내 무채색에 길들어 있던 눈이 꽃 사정 따져가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만 속 타는 것은 제4차 대유행을 걱정하는 방역 당국뿐. 특히 지난 주말부터 수도권에 핀 벚꽃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어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눈치다.

서울 거리를 메우고 있는 만개한 벚꽃을 보며, 우리가 봄꽃을 바라보는 시선이 벚꽃에 맞춰져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송이의 꽃도 다 핀 모습을 기대하고, 군집한 꽃들도 흐드러지게 만개한 모습을 어느 순간부터 바라고 있는 우리다.

장성 백양사 대웅전 한편에 있는 ‘고불매’. 만개한 시점은 지났지만, 홍매가 제대로 향기만큼 피워 전국 4매의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장성 백양사 대웅전 한편에 있는 ‘고불매’. 만개한 시점은 지났지만, 홍매가 제대로 향기만큼 피워 전국 4매의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달말 늦은 매화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전국 4매를 즐기기 위한 조금은 빠듯한 일정이었다.

전국 4매는 전남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그리고 강원도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를 말한다.

모두가 천연기념물로 등재된 고매들이다. 그러다 보니 매화나무 한그루마다 다 이름이 있다. 매화만의 특권이지 않을까 싶다.

탐매. 매화 경치에 빠져 찾아 나서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이 이른 봄이면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꽃은 매화였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백옥같은 꽃망울을 틔우는 매화를 보며 선비들의 기상을 꽃에서 느꼈던 탓이다.

퇴계 이황이 그랬고, 남명 조식이 그랬다. 자신이 추구하는 성리학의 지향점에서 매화를 만난 것이다. 오죽하면 매화에 관한 시를 그토록 많이 남겼겠는가.

이 지점에서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은 탐매의 기준이다. 매화는 사귀(四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희(稀), 노(老), 수(瘦), 뇌(雷). 풀어 말하면 “번거로운 것보다 희귀한 것을, 젊음보다 늙음을, 살찐 것보다 야윈 것을, 활짝 핀 것보다 꽃봉오리를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인 박정만은 〈매화〉라는 시에서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달아 두 송이 세 송이……다섯 송이 열 송이” 수런수런 열린다고 쓰고 있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는 나무의 80% 정도가 고사한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나무가지에서 매화 꽃망울을 펴고 있다.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는 나무의 80% 정도가 고사한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나무가지에서 매화 꽃망울을 펴고 있다.

다른 봄꽃처럼 성급하게 서둘지도 않고, 화려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매화 중의 매화로 꼽는 ‘납월매’는 섣달 모진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다.

조선의 선비들이 화분에 매화를 가져와 한겨울에 매화꽃을 보려 했던 것도 바로 ‘설매(雪梅)’를 궁극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화를 바라봤던 시선은 풍성한 벚꽃의 탐미 조건과 사뭇 다르다.

이른 봄 매화를 보려는 마음은 꽃으로 지친 일상을 벗어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추위를 이겨내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현재의 고된 일상을 이겨낼 힘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3월말 전국 4매의 위용은 3월 중순보다 못했다. 하지만, 각각의 매화가 지닌 기풍은 어디 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엄매’는 흑매라 불릴 만큼 붉은빛을 다하며 각황전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고불매’는 백암산 봉우리에 밀리지 않고 꽃의 기풍을 끌어내고 있었으며, 선암사 무우전(無憂殿)에서 지는 ‘선암매’의 남은 매화는 지각한 탐매객에게 매화의 사귀를 느끼게 했으며, 폐사지처럼 지고 있는 오죽헌의 ‘율곡매’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체득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추운 겨울을 이겨낸 매화를 찾는 길손들의 탐매심은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잎보다 꽃을 내는 나무들이 지난가을에 이미 꽃을 만들어두고 겨울을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 미리 준비돼 있었으니, 조건이 되었을 때 꽃을 피운 것이다.

준비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조건이 찾아와도 꽃은 피지 않는다. 매화가 전하는 지혜가 바로 이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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