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끝, 꽃 그리워 나무 이름도 매화라 불렀던 우리
긴 장마 시작하기 전 매실 익을 땐 눈에 열매만 가득 담겨

퇴계 이황만큼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매화 사랑은 그지 없다.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매화를 그리워했던 그를 모시고 있는 안동의 도산서원에도 매화나무가 수십그루 심어져 있다. 사진은 매실이 가득 맺혀 있는 도산서원의 매화(실)나무다.
퇴계 이황만큼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매화 사랑은 그지 없다.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매화를 그리워했던 그를 모시고 있는 안동의 도산서원에도 매화나무가 수십그루 심어져 있다. 사진은 매실이 가득 맺혀 있는 도산서원의 매화(실)나무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매화나무는 식물도감에 매실나무로 되어 있다.

꽃을 중심에 두느냐, 열매를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달리 부르지만, 겨울의 끝을 알리는 꽃소식이 반가워 우리는 흔히들 매화나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시인 이육사가 자신의 시 ‘광야’에서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노래했듯이, 우리는 매화를 납월매로 기억하려고 한다.

하지만 올해는 눈 속의 매화를 보지는 못했다. 전국의 4매(선암매, 고불매, 화엄매, 율곡매)를 찾아다니며 탐매를 했던 지난 3월, 매화는 네 가지의 귀한 점(사귀, 四貴)을 뽐낸 뒤,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3월 초부터 하순까지 지역 날씨에 따라 달리 꽃을 피웠던 매화. 올해 대부분의 봄꽃이 철을 잃고 일찍 개화했던 것처럼 매화도 제철보다 이르게 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틀 동안 전남 순천과 구례, 장성, 그리고 강원도 강릉을 돌면서 만개한 꽃도 만나고, 철 지나 꽃술만 남은 매화를 보기도 했고, 대부분 고사하고 가지 몇 개만 살아 힘겹게 꽃을 틔우는 나무도 보게 됐다.

제각각이었던 꽃들이지만, 다들 자신만의 이야기는 채워져 있었던 매화였다. 

이런 매화를 우리는 사랑한다. 사람들이 매화를 즐기던 까닭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보다는, 그래서 화려함을 들춰내기보다는 고적한 산사에서 느끼는 여유로움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바람도 불기 전에 꽃망울을 틔우는 용감함에 있을 것이다.

특히 나이를 제법 먹은 나무들이 용트림하듯 구불구불한 모양새로 자라면서, 거친 껍질로 겨우 자기 몸을 가린 가지에서 꽃을 피우는 모습은 어린나무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매화의 품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꽃을 피운 매화는 봄비 몇 차례에 산화하듯 졌고, 이내 열매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튼실해진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가 딱 이맘때다. 시장에는 푸른빛의 청매가 나와 있고, 7월 초쯤이면 노란빛의 황매도 선보인다.

봄에는 꽃에, 그리고 여름에는 열매에 눈이 가는 매화(실)나무. 장마가 지고 있는 지금이 매실(황매)의 제철이다. 사진은 예산 추사고택에 있는 매화나무에 매실이 맺혀 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꽃에, 그리고 여름에는 열매에 눈이 가는 매화(실)나무. 장마가 지고 있는 지금이 매실(황매)의 제철이다. 사진은 예산 추사고택에 있는 매화나무에 매실이 맺혀 있는 모습이다.

매실이 지천이면 며칠 뒤부터 장마가 따른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서처럼 “분말처럼 뭉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마를 중국이나 일본에선 매우(梅雨)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마전선이 양쯔강에서 형성돼 한반도까지 올라오는 관계로 위도상 남쪽인 중국의 양쯔강 지역은 우리보다 일찍 장마에 든다. 그리고 따뜻한 만큼 매실도 일찍 익는다.

중국 송나라 시기의 증기(曾幾)라는 문인이 쓴 ‘삼구산 산길에서’라는 시에 “매실이 노랗게 익어갈 때 날마다 쾌청한 하늘”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황매가 익어가면 장마가 들어야 하는데,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며 기후의 역설을 시에 담기도 했다. 

이렇게 매실을 수확하는 시기가 되면 우리는 간절히 꽃망울 터뜨리기를 바랐던 매화를 잊게 된다.

장아찌와 술을 담글 요량으로 매실을 바라보면서 매화를 기억에서 지우고 있다. 그래서 쓰인 시가 한 편 있다. 시인 최두석의 시 ‘매화와 매실’이다.

“선암사 노스님께/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꽃은 열매를 맺으려 피고, 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시인이 꽃과 열매의 본질을 제대로 잡아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개의 존재가 전혀 타자가 아님에도 우리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오다 이 시에서 뒤통수를 한번 맞게 된다.

지난 5월과 6월 찾았던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과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에는 매실이 튼실히 익어가고 있었다.

최두석 시인의 말처럼 봄에는 매화나무, 그리고 여름에는 매실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겹지 않은가. 신맛 가득 담긴 매실주 한잔을 그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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