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 형상의 마을, 나쁜 기운 막으려 마을 초입에 나무 심어
온계 선생 분가하면서 식재, 500년 된 나무 지금도 밤 열려

밤나무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의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투성이의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산에 주로 식재한 나무다. 경상북도 안동 온혜리 마을입구에는 특이하게도 수령 500년이 넘은 밤나무가 당산나무처럼 식재돼  있다. 지네처럼 생긴 마을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일부러 심은 나무다. 사진은 온계 종택에서 바라본 밤나무다.
밤나무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의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투성이의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산에 주로 식재한 나무다. 경상북도 안동 온혜리 마을입구에는 특이하게도 수령 500년이 넘은 밤나무가 당산나무처럼 식재돼 있다. 지네처럼 생긴 마을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일부러 심은 나무다. 사진은 온계 종택에서 바라본 밤나무다.

<대한금융신문=김승호 편집위원> 아카시아 꽃향기가 온 산을 가득 채울 때가 되면 산은 튼튼한 초록 근육으로 뒤덮인다.

아카시아가 지면 초록은 진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육체미 선수라도 된 듯 근육질 몸매를 자랑한다.

그때쯤 온산을 덮는 것이 가늘고 작은 흰 꽃대에 다닥다닥 붙어서 꽃차례를 이루며 마치 뭉치 수염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밤꽃을 보게 된다. 6월 초 이 땅의 풍광이다.

특히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달리면 그 순간을 제대로 포착하게 된다. 바람에 휘날리는 밤꽃 향기가 자동차 안으로도 전해질만큼 공주시 정안의 산야는 밤나무가 지천인 곳이다.

그런데 꼭 공주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땅 어디를 가나, 산에서 참나무만큼 자주 만나는 나무가 밤나무다. 

밤나무는 산에서 주로 자란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밤나무는 산에 자연적으로 나는 산밤나무와 이를 기본으로 개량한 품종들이 주로 서식한다.

중국 진나라 무제가 만든 사서 《삼국지》와 송나라 문제가 만든 《후한서》 등을 살펴보면 ‘마한’에 대한 기술에서 굵기가 배만한 밤이 난다는 내용이 있다. 그만큼 한반도 이남 지역의 밤이 유명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때의 기록을 보면, 농경지가 아닌 산야에 밤나무와 뽕나무 등의 나무 심기를 자주 권장한 것으로 나온다.

그만큼 산에 경제림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고, 밤나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땅과 잘 어울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밤나무 조성에 사람이 개입한 것은 꼭 고려 때만의 일은 아니다.

쌀과 밀 등의 곡물이 사람 손으로 수확할 수 있도록, 이삭이 떨어지지 않는 품종이 등장하기 전까지 밤은 도토리와 함께 초기 인류의 중요한 식량원이 돼 주었다.

따라서 밤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손이 많이 가는 인위적인 경관의 대상이 됐다. 수형도 높은 키보다는 옆으로 넓은 모습이 되도록 다듬게 되고 열매도 잘 맺는 품종으로 개량하게 된다.

온계종택은 퇴계 이황의 친형인 온계 이해가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현재의 집은 온계의 직계 12대손인 이인화 선생이 구한말 의병장 활동을 한 것을 빌미로 일제가 불살라, 정부가 나중에 원형으로 복원한 건물이다. 집의 뒤편에 있는 소나무가 집을 감싸는 구조로 세워져 있으며 종택 앞에는 500년된 밤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온계종택은 퇴계 이황의 친형인 온계 이해가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현재의 집은 온계의 직계 12대손인 이인화 선생이 구한말 의병장 활동을 한 것을 빌미로 일제가 불살라, 정부가 나중에 원형으로 복원한 건물이다. 집의 뒤편에 있는 소나무가 집을 감싸는 구조로 세워져 있으며 종택 앞에는 500년된 밤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다.

이렇게 사람 손에 의한 조경이 이뤄지면서, 느티나무나 버드나무와 달리 밤나무는 더욱 산에만 서식하게 된다.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갑옷과 가시를 온몸에 두르고 열매를 맺는 밤의 특성도 이런 환경 조성에 한몫하게 된다.

그런데 경상북도 안동에 가면 이처럼 산에서 주로 자라는 밤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처럼 초입에 한 그루 서 있다. 온계 종택 앞의 밤나무가 그렇다.

온계 종택은 퇴계 선생의 바로 위 친형인 온계 이해(李瀣)의 집이다. 온계는 퇴계보다 일찍 관직에 나가 대사헌과 대사간, 그리고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등을 두루 역임한다.

그러나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그의 말로는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충청도 관찰사 재직할 때 무고한 내용으로 탄핵당해 곤장 100대를 맞은 뒤 귀양길에서 병사하고 만다.

종택 앞의 소나무는 노송정(퇴계와 온계의 생가) 종택에서 분가(1516년)하면서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온계는 분가하면서 마을의 약한 기운을 보하기 위해서 밤나무를 심는다. 마을의 모양이 마치 지네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독이 있는 해충인 지네를 닮았으니, 풍수적으로 보충하는 방법은 지네를 제압하는 것인데, 여기에 밤나무가 제격이었다.

지네가 가시가 있는 밤송이를 피하는 습성이 있어 여러 곳에서 토종인 산밤나무를 심어 해충을 막았던 이치를 마을에 적용한 것이다.

아직도 이 나무에는 꽃이 피고 밤송이가 열린다. 지난 6월 온계 종택을 방문했을 때도 나무는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의 높이는 대략 12m, 둘레는 5.5m 정도. 500년의 역사는 성장한 나무의 굵은 줄기가 말해준다.

2~3m까지 웅장하게 뒤틀리면서 자라던 나무는 여러 개의 큰 줄기로 나눠 수형을 이루고 있다. 나무 앞에서 종택을 바라보는 풍광도 좋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온계의 직계 12대손 이인화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제는 이런 기백을 제압하기 위해 종택을 불사른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온계 종택은 정부에 의해 원형 복원된 건물이다.

멋지게 생긴 밤나무만큼 항일의 역사를 담고 있는 종택의 아우라는 직접 가서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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