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명인체험 13] 백정자 명인의 ‘즙장’은 밥도둑

전남 강진 해주최씨 종가의 내림음식으로 전수 누룩 엿기름과 메주, 염장채소 넣고 속성 발효

2024-11-24     김승호 편집위원
백정자 식품명인이 해주최씨 종가에서 내려오는 즙장 만들기를 시연하고 있다. 즙장은 바쁜 농사철에 식사를 빨리하기 위해 미리 만들어둔 비빔장이다.

일손 바쁜 농사철에 손 빠르게 먹을 수 있도록 속성으로 만든 장이 있다. ‘즙장(汁醬)’이다. 지금은 만들어서 먹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모두가 농사를 짓던 조선시대만 해도 지방별로 다양한 속성장(단기장)이 있었다. 깻묵장, 담북장, 두부장 등 빨리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장들이 《증보산림경제》 《규합총서》 《부인필지》 등의 고조리서에 등장한다.
 
전남 강진에 있는 해주최씨 종가에도 내림 음식으로 만들어 오던 즙장이 있다. 대한민국식품명인 제65호로 지정된 백정자 명인의 즙장이다. 즙장은 메줏가루와 염장한 채소류를 넣어 만드는 장이다. 백정자 명인의 즙장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난 15일 대한민국식품명인협회 식품명인체험홍보관(관장 조윤주)을 찾았다.

식품명인체험홍보관에서 진행된 즙장만들기 체험행사에서 백정자 명인이 체험객에게 직접 즙장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설이 지나면 입맛이 떨어져요. 그래서 깻묵으로 장을 만들었는데, 주로 늦겨울에 만들었어요. 봄에 먹기 위한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늦여름에는 즙장을 만들어 가을 들일을 앞둔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었습니다.” 백정자 명인 집안에서 즙장을 만든 까닭이다.

백 명인의 즙장은 메주부터 다르다. 일반적인 장류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하지만 백 명인이 즙장을 만들 때는 콩과 밀, 찹쌀을 배합해서 사용한다. 물론 콩이 가장 많이 들어가지만, 밀과 찹쌀을 각각 20%씩 넣어서 영양분을 고루 섭취할 수 있도록 만든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장은 우리 음식의 기본 조미료이자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이다. 특히 발효식품은 저장성이 커져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발효과정에서 만들어진 감칠맛은 다른 식재료의 맛을 상승시킨다. 즙장도 마찬가지다. 비빔장의 기능은 물론 만들 때 넣은 다양한 채소가 비빔밥의 재료를 대신해 줘 보통의 장으로 밥을 비빌 때보다 더 영양상 좋다는 것이 백 명인의 설명이다.

고조리서의 기록에 따르면 즙장은 여름에 만들어 먹는 장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백정자 명인은 속성으로 발효시키기 때문에 여름에 만들기 힘들다고 말한다. 백 명인의 집안에서는 가을 추수철에 맞춰 먹기 위해 늦여름 끝물로 거둔 채소를 염장해 두었다가 이듬해 가을 초입에 즙장을 만들었다. 만드는 과정은 속성이지만, 재료 준비는 1년에 걸쳐 해야 하는 슬로우푸드인 셈이다. 

백 명인의 즙장은 다음과 같이 만든다. 우선 가지와 노각, 무, 고춧잎 등의 채소류를 먹기 편한 크기로 손질해서 염장해 둔다. 염장을 위한 절임육수는 멸치육수에 3년 이상 된 천일염을 녹여서 사용한다. 염도는 김치 담을 때보다 조금 더 짠 정도로 맞추면 된다.

다음은 즙장 발효용 찹쌀죽을 만들어야 하는데 백 명인은 찹쌀가루가 아닌 밥을 지어서 죽을 만든다. 그래야 숙성 후에도 절임채소가 물러지지 않고 식감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죽까지 만들었으면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여기에 ‘메주·누룩·엿기름’가루를 넣는다. 그리고 염장해 두었던 채소의 물기를 최대한 제거한 뒤 찹쌀죽에 넣고 마지막에 고춧가루를 넣어서 버무리면 된다. 여기서 포인트는 찹쌀죽에 ‘메주·누룩·엿기름’가루를 미리 섞어서 하룻밤을 재우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발효시키기 위함이다.

다 버무린 장은 밀봉해서 20일 정도 숙성시킨 뒤 비빔장으로 이용하면 된다. 예전에는 이렇게 만든 즙장을 퇴비 속에 넣어서 3일 정도 숙성시켰는데, 지금은 30도 이상의 방에서 이틀 정도 이불을 덮어서 숙성시키면 된다고 백 명인은 말한다. 

체험행사의 마지막은 백 명인의 즙장 시식이었다. 갓 지은 밥에 즙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서 한입 먹었다. 감칠맛이 상상 이상이다. 왜 즙장을 밥도둑이라고 말하는지 시식하는 순간 알게 되었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