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명인체험 22-2]
선암사 다맥 이으며 야생 녹차밭 일군 신광수 명인

2025-06-01     김승호 편집위원
신광수 식품명인의 야생작설차 만드는 방법을 시연한 후 신선미, 신희찬 전수자가 완성된 녹차를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김승호 편집위원)

차를 만드는 것은 불과 싸우는 과정이다. 섭씨 300도의 가마솥 환경을 만들어 찻잎의 수분을 날리고 상처를 내기를 9번, 일명 구증구포의 과정이다. 불 앞에서 가마솥 속의 찻잎을 덖은 뒤 꺼내 멍석에 올려 수없이 찻잎을 비비는 과정을 9번 한다는 뜻이다. 비로소 모습을 나타낸 찻잎은 수분을 잃어서인지 처음의 녹색은 사라지고 검은색에 가깝다.

처음 가마솥에 올려진 찻잎은 ‘더덕더덕’ 소리를 낸다. 찻잎의 두께만큼 둔탁한 소리다. ‘더덕’거리는 소리는 서서히 ‘타닥’으로 바뀌고, 다섯 차례쯤 살청을 하고 나면 ‘바스락’으로 바뀌어 있다. 수분이 사라졌다는 것은 눈으로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신광수 식품명인의 차는 구증구포로 만든다. 사진은 전수자인 신희찬 씨가 녹찻잎 비비는 방법을 체험객에게 설명하는 모습이다. (사진=김승호 편집위원)

지난 5월 15일 신광수 식품명인의 야생 녹차의 제다 체험이 있었다. 행사장은 갓 따온 찻잎을 덖는 과정에서 올라온 차향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20여 명의 체험객은 순서를 바꿔가며 직접 가마솥에 손을 넣어 찻잎을 덖었고(살청 작업), 꺼낸 뒤에는 상처를 내기 위해 땀이 날 정도로 찻잎을 비벼주었다(유념 작업). 산속 다원에 가서야 체험할 수 있는 제다를 서울 한복판에서 경험하는 행사였다. 

신광수 명인은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전수자인 신선미(딸)·신희찬(아들) 씨의 진행으로 구증구포를 거쳐 녹차를 만들고 완성한 녹차를 시음했다. 구증구포는 신광수 명인의 다맥인 순천 선암사의 제다 문화다. 찻잎의 상태에 따라 횟수가 달라지지만, 대체로 아홉 번에 걸쳐 살청과 유념을 해서 차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신광수 명인의 차는 야생 차나무의 찻잎으로 만든다. 가지런히 정리된 재배종 차나무의 찻잎과 다르다. 매끄럽게 전지된 차밭의 찻잎은 야생종에 비해 얇다고 한다. 신광수 명인의 차밭은 산딸나무와 대나무, 은행나무가 같이 자라는 공간이다. 따라서 야생 차나무가 재배종보다 더 깊게 뿌리를 내린다. 3m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양분을 얻기 위한 차나무의 생명 활동인 것이다. 그래서 차향이 그윽하다는 것이 전수자들의 설명이다. 

신광수 명인은 가마솥에 불을 때서 유념 작업을 한다. 보통 잡냄새가 없는 잘 마른 참나무와 오동나무, 감나무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참나무와 감나무를 쓴다. 화력이 세고 열량이 많아서 온도를 빨리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접어들면 나무를 바꿔준다. 화력이 약한 오동나무를 써야 찻잎이 쉽게 타지 않고 유념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산에 있는 나무라고 다 땔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와 향나무는 향이 강해 녹차의 향을 오염시킬 수 있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략 불을 지피는 온도는 섭씨 300도. 찻잎의 수분이 많거나 습도가 높으면 온도를 더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작업하는 날의 기후조건과 찻잎 상태를 고려해 불의 온도를 결정한다. 

찻잎을 덖는 과정을 ‘살청(殺靑)’이라고 한다. 찻잎의 수분을 날려 푸른색을 없애는 과정이다. 횟수를 더할수록 푸른 빛은 사라지고 수분을 잃은 찻잎은 짙은 무채색으로 바뀐다. 살청 뒤에는 유념(揉捻) 작업으로 넘어간다. 뜨거운 가마솥에서 달구어진 찻잎을 꺼내 멍석에서 손으로 비벼 일일이 상처를 내는 과정이다. 찻잎에 상처를 내면 세포벽이 파괴되어 카페인 등의 알칼로이드 물질이 밖으로 나오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찻잎은 생명을 얻게 된다. 

유념이 잘 된 찻잎은 여러 차례 우려 마실 수 있고 차맛도 일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횟수도 줄고 차맛도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서너 번쯤 유념 작업을 진행하자 찻잎이 끈적해졌다. 살청과 유념을 반복할수록 잎의 수분이 날라가 조금씩 찻잎의 형태도 갖춰져 갔다. 이처럼 제다 과정은 감각을 모두 이용해서 만드는 과정이다. 눈은 덖으면서 달라지는 찻잎의 모양과 색을 보고, 귀는 덖는 과정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코는 싱그럽고 풋풋한 향의 변화를 맡고, 입은 찻잎의 맛을 확인하고, 손은 덖고 유념하며 수시로 온도를 점검한다. 

모든 감각을 이용해 찻잎을 아홉 차례 살청과 유념하자 처음의 야생 찻잎 1.2kg은 400g의 녹차로 줄어들었다. 찻잎의 수분율을 기준으로 보면 90% 이상에서 4%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수분을 날린 녹차는 오래 두고 마실 수 있다고 두 전수자는 말한다.

신광수 명인은 ‘야생작설차’로 식품명인이 되었다. 선암사에서 내려오는 차 문화를 이어받아 지난 1999년 명인으로 지정됐다. 선암사의 다맥의 전통은 유구하다. 다맥의 전승계보에 따르면 신 명인은 1500년대 의병(승병)장 청허 휴정스님 이후 17대째다.

신 명인의 부친은 선암사의 주지였던 용곡 스님이다. 두 살 때부터 선암사에 머물며 선암사의 차를 몸으로 익혀왔다고 한다. 야생의 차나무를 가꾸면서 차를 만든다는 자부심의 근원인 셈이다. 명인의 다원도 천년 고찰 선암사의 초입인 ‘죽학리’에 자리하고 있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