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우리술 413] “우리 MZ세대는 섬세하게 위스키 찾아요”
‘위스키내비’ 천관호 대표, 국내외 업체 초청 첫 개최 독립 병입 위스키와 오크통 숙성소주까지 한곳에 모아
발효와 숙성은 인류가 식량을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발견한 방법이다. 이 과정을 거친 음식이 더 맛있고 소화하기 쉬운 식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인류는 발효와 숙성에 진심을 보였다. 그 결과 우리는 더 풍요롭게 음식의 맛을 즐기게 됐다.
술도 다르지 않다. 부패와의 경계선을 오가는 발효와 숙성은 술에선 더 다양한 경험을 인류에게 주었다. 발효가 취하게 만드는 알코올을 만들었다면, 그 알코올에 새 생명을 부여한 것은 숙성이다. 특히 나무통에서의 숙성은 술의 차원을 올려놓았다. 오크통에 들어간 알코올은 시간과 맞바꾼 새로운 향미와 부드러운 음용감을 프리미엄의 품격으로 여기며 소중히 간직한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오크통 숙성 주류의 세계로 초대받고 있다.
11월초, 캐스크 숙성 주류들의 잔치가 국내 처음으로 서울 삼성동 봉은사 인근 jbk컨벤션홀에서 열렸다. 행사의 이름은 ‘캐스크 카니발’. 국내외 증류소의 위스키와 오크통 숙성 소주, 그리고 독립 병입 업자의 위스키까지 총 25개의 업체가 부스를 마련하고 다양한 숙성 주류를 젊은 고객들에게 선보였다.
주최자는 2020년 ‘위스키내비’라는 독립 병입 업체를 만든 천관호 대표다. 독립 병입 업체는 증류소에서 위스키 원액을 사들인 후 자기가 숙성·병입해서 별도 상표를 붙여 판매하는 회사를 뜻한다. 천 대표는 위스키 관련 사업을 해오면서 축적한 정보와 네트워크를 활용해 국내 처음으로 오크통 숙성 주류박람회를 개최한 것이다.
목적은 오크통 숙성 주류 시장의 안정적 성장이다. 위스키에 관한 국제기준인 3년 숙성 국산 위스키가 연이어 발표되고, 국제주류품평회에서 수상작을 내면서 위상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2022년 이후 급성장하던 위스키 시장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새로운 활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천 대표는 소비자들이 오크통 숙성 주류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관련 주류를 한군데 모으고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마당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천 대표는 국산 위스키 업체와 최근 시장이 조성되기 시작한 오크통 숙성소주 업체에도 문호를 개방하고 내실 있는 박람회가 될 수 있도록 해외업체까지 섭외에 나섰다. 이 과정을 통해 스코틀랜드와 일본, 대만, 뉴질랜드 등의 증류소 및 독립 병입 업체까지 참여하게 돼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다국적 주류박람회가 완성되었다.
‘캐스트카니발’ 행사 이틀 동안 1,300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티켓은 행사 이전에 마감됐다. 쾌적한 환경에서 술을 시음하면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시간당 입장객을 제한했다. 따라서 대형 컨벤션홀에서 열리는 주류박람회보다 참여업체나 관람객 수는 적었지만, 관람객들의 만족도는 무척 높았다는 것이 주최 측의 자평이다. 특히 숙성 주류에 관련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MZ세대의 정보 욕구를 채울 수 있도록 행사장 한편에서는 캐스크 숙성 주류에 관한 아카데미도 같이 운영했다.
한국 캐스크 숙성 주류 시장
이 행사에 참여한 한 영국업체의 대표는 “지금까지 참가한 주류박람회 중에서 가장 젊은 관람객이 많다”며 한국 시장의 역동성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 천관호 대표는 외국의 경우 40~60대 남성이 위스키의 주요 소비자이지만, 우리나라는 20~40대 젊은 남성층이 주력이어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우리 소비자들은 오크통 숙성 주류에 관해 섬세하게 접근해서 원액의 주질과 숙성장소 등 주요 제원을 꼼꼼히 챙겨가며 소비하는 특징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천 대표는 “와인은 문과생들의 술이라면, 위스키는 지극히 이과적인 술”이라고 말한다.
또한 동아시아 MZ세대는 동일 브랜드의 위스키라고 하더라도 고연산 원액이 들어 있는 제품을 더 선호하고, 술병의 레이블과 패키징도 세심하게 살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과 대만의 독립 병입 업체와 ‘위스키내비’의 위스키 패키징이 좀 더 감성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명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레이블에 담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축하는 위스키 시장
최근 시작된 관세 전쟁은 고급 위스키 시장을 빠르게 위축시켰다. 인상된 관세만큼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불경기와 함께 원화 가치의 하락으로 구매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구매력 감소는 값비싼 프리미엄 주류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증류주 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독립 병입 업체’를 제도적으로 장려해야 한다고 천 대표는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주세법에 따르면 증류는 물론 숙성과 병입이 모두 한 장소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숙성과 병입 면허가 따로 있다면, 양조 면허 없이도 증류소에서 숙성 중인 원액을 구매해 새로운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다. 증류소로선 미래의 상품을 앞당겨 판매해서 자금회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소비자는 독립 병입 업체의 트렌디한 술을 만날 수 있어서 다양한 주류 소비가 가능해진다. 이처럼 지금까지 없던 시장을 새로 만들면서 증류주 생태계의 안전망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천 대표는 강조한다.
오크통 숙성 소주의 나아갈 길
위스키와 증류식 소주는 출발이 다른 술이다. 위스키는 처음부터 숙성을 고려해서 설계한 술이다. 발효와 증류 모두 양조자의 설계에 따라 이뤄진다.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최종 결과물은 달라진다. 설계의 주요 요소는 몰트(또는 곡물)와 효모의 종류, 발효 시간, 증류기의 모양과 증류액이 넘어가는 스완넥의 구조, 숙성에 사용할 증류 원액의 컷팅 알코올 도수 등 다양하다. 심지어 다양한 원주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증류소와 원액을 교환하거나 교환문화가 없는 일본의 증류소들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원주를 생산한다.
그런데 우리의 증류소주는 숙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술이다. 숙성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증류주 중 숙성 시스템이 있었던 곳은 중국(백주)과 오키나와(아와모리) 두 곳이다. 증류 원액의 향이 강하기 때문에 바로 마실 수 없어서 숙성을 통해 향기를 다듬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증류식 소주는 바로 마셔도 불편하지 않았고, 심지어 새술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숙성주가 발전하지 않았다.
따라서 숙성에 관한 과거의 연구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최근 들어 프리미엄 주류를 만들기 위해서 장기 숙성 증류주가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지만, 숙성의 역사가 짧아 아직 교범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데이터가 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양조장 입장에선 고가의 수입 주류와 경쟁하기 위해 해외 사례를 기준 삼아 오크통 숙성을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주의 개성을 부여하라
대기업들은 감압식 증류 소주를 오크통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가형 와이너리에선 브랜디를 오크통에 넣었다. 최근에는 상압식으로 증류한 소주들이 오크통을 찾기 시작했다. 오크통 수입 업체가 증가했고, 국내에서도 오크통 제작업체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3년 숙성을 마친 위스키와 오크통 숙성소주를 시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모두 오크 향을 즐기는 국내 소비자를 위해 기획한 술들이다.
위스키 스피릿은 숙성을 통해 불필요한 향기를 잠재우고 원하는 향기와 나무에서 온 향미를 보태 시간 속에서 숙성의 맛을 갖게 된다.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들은 최소 8년에서 12년은 두려고 하고 일본 위스키는 8년 정도를 숙성의 기간으로 잡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증류식 소주의 경우, 앞서 설명했듯 오크통 숙성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주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증류식 소주가 오크통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면 원주가 가진 개성이 나무의 향미에 묻히게 된다. 이와 관련 천관호 대표는 “3년쯤 오크통에서 숙성한 증류식 소주를 모아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크통에서 숙성할 소주는 판매용 소주와 다른 레시피로 만들 것을 권한다. 당화발효제, 다단식 증류기 활용법, 본류 컷팅 알코올 도수 등에서 차이를 둬야 숙성해도 개성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활용 오크통 사용해야
버번위스키는 새오크통에 넣어서 숙성하고 스카치위스키는 한번 쓴 오크통을 사용한다. 제도와 관행에 따른 것이다. 버번은 강한 옥수수 향을, 스카치위스키는 몰트 향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는 주로 쌀로 증류식 소주를 만들어 오크통에 넣는다. 쌀은 옥수수와 보리에 비해 향기가 적은 곡물에 속한다. 게다가 다단식 증류기나 감압식 증류기로 증류하면 더 깔끔한 증류 원액을 얻게 된다. 이 증류주를 오크통에 넣으면 나무의 향미를 잘 머금게 된다.
포도주를 오크통에 숙성할 때 새오크통에 넣어야 한다면 기간을 짧게 잡는다. 두 번째 사용하는 캐스크부터 기간이 길어진다.
증류식 소주도 마찬가지다. 새오크통이나 한번 사용한 오크통에선 숙성기간이 길면 안 된다는 것이 천 대표의 생각이다. 외국의 증류소들은 장기 숙성을 위해 자체적으로 두세 번째 사용 캐스크를 만드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증류소에서 주로 사용하는 숙성용 오크통은 첫 번째 사용 오크통이 아니라 재활용 오크통이라는 것이다.
천관호 대표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증류주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위스키와 관련한 사업을 하면서 얻은 정보와 감각에 따라 국산 증류소주에서 느낀 아쉬운 점을 답한 것이다. 오크통 숙성 주류 전체의 성장을 위해 내놓은 고언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그의 이야기에서 국내 양조장 관계자와 소비자들이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길 기원한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