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서 고루 재배하는 포도, 생산하는 양조장 많아
우리술품평회·아시아와인트로피 수상한 와인 다수

충북 영동은 대표적인 캠벨얼리 품종 생산지역이다. 지역에 40여개의 농가형와이너리가 있으며, 다양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영동와인터널에 전시돼 있는 영동 지역 와이너리의 캠벨얼리 제품들이다.(사진=손진호)
충북 영동은 대표적인 캠벨얼리 품종 생산지역이다. 지역에 40여개의 농가형와이너리가 있으며, 다양한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다. 사진은 영동와인터널에 전시돼 있는 영동 지역 와이너리의 캠벨얼리 제품들이다.(사진=손진호)

한 시대를 풍미했던 1세대 국산 포도주는 1987년 외국산 포도주의 수입자유화 조치로 사라지고 만다. 1980년대의 호황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시장을 개방하다 보니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 생산자들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포도주 생산을 포기한 대가로 받은 와인 수입권으로 더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됐다. 피해는 오직 대기업을 믿고 양조용 포도를 재배했던 농가들의 몫이었다.
 
양조용 포도 재배 기반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외국산 와인의 수입 급증과 생식용 포도 가격의 급락이라는 현안을 받아든 정부는 정책목표를 수정한다. 생식용 포도로 포도주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대기업은 관심이 없었다. 기술력도 없고 자본도 없는 농민들이 그 대상이 됐다. 지역특산주(농민주) 정책을 펴며 농가형 와이너리를 적극 유도하기 시작했다. 고작 남아 있는 포도 기반은 ‘캠벨얼리’와 ‘MBA(머스캣 베일리 에이)’, 그리고 ‘거봉’이었다. 특히 ‘캠벨얼리’의 재배면적은 2000년대 초까지 70%를 상회하고 있었다.
 
출신지는 미국이지만, 식용이라는 육종 목적을 머나먼 이국땅인 대한민국에서 100% 달성하며 ‘국민 포도’라는 칭호까지 받을 만큼 많이 소비되던 ‘캠벨얼리’에게 잔인한 목표가 주어진 것이다.
 
생식용 포도를 양조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은 네모난 타이어를 장착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주행하라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주문이다. 포도주의 미덕은 적절한 알코올 도수와 다채로운 향기다. 그리고 음식과 조화로움을 끌어낼 수 있는 신맛이다. 하지만 생식용 포도는 양조용에 비해 단맛이 덜하고 향기도 단조롭다. 당분이 있는 포도라면 다 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부른 무모한 행정적 요구였다.


농가형 와이너리의 등장


 힘들게 농사지은 자식 같은 과일을 제값 받지 못하고 출하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자 농부들은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일부 포도원들은 협동조합을 구성하였고, 안되면 단독으로라도 양조장을 계획하고 과실주 시장에 뛰어들었다.
 
충북 영동의 와인코리아는 1996년, 경기도 파주의 산머루농원은 1997년, 안산의 그랑꼬또와이너리는 2001년, 그리고 경북 영천의 뱅꼬레와이너리는 2006년에 문을 열었다. 2008년경 과실주 생산업체는 40여 개를 넘어선다. 이후 충북 영동과 경북 영천, 전북 무주 등 포도와 산머루 주요 생산지를 중심으로 포도주 양조장이 급증한다.
 
지자체에서 마련한 양조아카데미가 학구열을 달랠 수 있는 전부였다. 열정이 유일한 제조비법이었다. ‘켐벨얼리’는 당도가 높은 편(12~15브릭스)이 아니었다. 양조용 포도에 비해 당도는 낮고 과육은 컸다. 껍질의 색은 짙지만, 과즙이 많아 진한 붉은색의 포도주를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초창기 ‘캠벨얼리’ 포도주는 가당한 포도즙을 발효시켰고, 단맛을 살리기 위해 잔당을 많이 남겼다. 신맛보다 단맛을 강조했고, 타닌까지 적었으니 포도주의 맛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국산 포도주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포도주의 주 소비자층은 서구적 잣대로 포도주를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니 생식용 포도로 만든 포도주에 대해 우호적일 수 없었다. 특히 ‘캠벨얼리’는 북미종인 ‘비티스 라브루스카’였다.
 
유럽의 양조용 포도인 ‘비티스 비니페라’와 달리 ‘라브루스카’ 품종은 독특한 향(폭시플레이버) 때문에 포도주 양조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홍글씨가 이미 새겨져 있었다. 편견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농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농사의 가치와 수확의 기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포도주 생산자들은 지자체가 만든 양조아카데미를 거듭 이수하면서, 그리고 대학의 양조학과를 다니면서까지 양조 기술을 높였다. 농촌진흥청과 각 지자체의 농업기술원에서 개발한 기술을 자신들의 포도원과 와이너리에 적용하기도 했다. 필요하면 외국의 선진기술을 보기 위해 해외의 와이너리를 찾아 나섰다.

 


편견에 맞선 생산자들


포도주 맛을 개선하는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고 배우고 적용했다. ‘캠벨얼리’의 부족한 단맛을 채우기 위해 늦수확을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동결 착즙 과정을 거치면서 당도를 높이는 방법도 사용했다. 숙성에서 오는 포도주의 맛과 향을 위해서 참나무 목통에 넣어 장기 숙성의 가능성도 타진했다. 또한 부족한 탄닌을 보충하기 위해 여타 품종과의 블랜딩도 수없이 시도했다.
 
특히 드라이한 맛의 균형 잡힌 적포도주를 만드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배우려고 했다. 이유는 드라이한 적포도주를 ‘생산자의 자존심’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많은 양을 생산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만, 생산자들은 일반인들의 편견에 도전하며 2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충북 영동에서 ‘그랑티그르’와 ‘베베마루’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는 월류원의 박천명 대표는 “루머성 가짜뉴스와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특히 “3년 숙성하면 캠벨얼리 포도주는 식초가 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악의적인 가짜뉴스와 싸우기 위해 5년 이상 된 포도주를 시음시키며 ‘캠벨얼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이와 함께 그를 괴롭힌 이야기는 “포도즙에 증류주를 탄 맛이다”라는 평가였다. 전문가들이 시음한 뒤 내놓는 악평이었다. 서구의 시각으로 풀어낸 말이어서 무척 답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이 결국 지금까지 ‘캠벨얼리’ 포도주의 주질을 개선하는 동력이 됐다고 회고한다.
 
광명동굴의 운영자였던 최정욱 소믈리에(와인연구소장)는 캠벨얼리 품종을 애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소믈리에들의 악평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 소장은 “우리와 가장 친숙한 포도가 이 품종”이라며 “강한 양념이 들어가는 우리 음식과의 페어링에서 ‘캠벨얼리’ 만큼 좋은 품종은 없다”고 말한다.
 
생산자들의 노력으로 적당한 산미와 구조감이 좋은 포도주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5~10년의 숙성도 가능한 와인이 등장하고 있다며 ‘캠벨얼리’를 좀 더 따뜻하게 봐 달라고 주문한다.


‘캠벨얼리’의 새로운 가능성


그 덕분에 몇년 전부터 노력의 결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농림부 주최의 우리술품평회 과실주부문에서 ‘캠벨얼리’ 품종이 상을 받기 시작했다. 대전와인엑스포 기간에 진행되는 ‘아시아와인트로피’에서도 간헐적으로 상을 받더니 올해에는 여러 양조장의 ‘캠벨얼리’ 제품이 상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그동안 우리술품평회에서 ‘캠벨얼리’로 수상한 와이너리는 충북 영동의 컨츄리농원(2020년 대상)과 도란원(2013·2018·2021년 대상 및 우수상)이다. 그리고 올해 ‘캠벨얼리’로 아시아와인트로피에서 상을 받은 곳은 도란원(샤토미소 프리미엄드라이, 골드), 월류원(‘그랑티그르 S1974’와 ‘베베마루 설레임’, 각각 실버), 불휘농장(시나브로 캠벨드라이, 실버), 금용농산(미르아토 로제스위트, 실버), 마미와이너리(눈어치 레드스위트, 골드) 등 모두 5곳이다.
 
‘캠벨얼리’ 품종의 포도주는 와이너리라는 이름을 건 거의 모든 양조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특히 영동 지역은 모두가 ‘캠벨얼리’ 제품을 자신의 라인업에 포함하고 있다. 재배지역이 전국에 걸쳐 있어서 생산 양조장 또한 전국에 걸쳐 있다.
 
최근의 트렌드는 ‘캠벨얼리’ 품종의 장점을 극대화한 제품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과즙이 많아 포도주의 색이 짙지 않은 점은 오히려 로제 스타일에서 빛을 보게 만들었고, 부족한 타닌을 채우기 위해 선택한 산머루, 아로니아 등의 부재료는 블렌딩을 통한 새로운 포도주 맛의 세계를 열어줬다.
 
그 결과 ‘캠벨얼리’의 화사한 과일향과 개량머루의 바디감이 합쳐져 다채로운 맛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포도주가 늘었다. 그리고 이 포도주들이 ‘캠벨얼리’ 품종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산자들은 입을 모은다.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편견과 싸워온 농부와 생산자 덕분에 우리는 미식의 다양성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포기했다면, 품질 좋은 ‘캠벨얼리’ 적포도주를 우리는 마실 수 없었을 것이다.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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