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절집, 고택, 서원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여름꽃
조선 중엽 오이정, 정자 만들고 배롱을 위해 만든 원림조성

전라남도 담양은 가사문학의 고장이자 원림의 고장이다. 그 중 명옥헌은 배롱나무가 지천인 곳이다. 뜨거운 여름 햇볕을 받아가며 관광객들이 모이는 이유도 바로 배롱나무 때문이다. 사진은 명옥헌 앞 연못이며,  연꽃 가득한 연못과 그 주변에 심어진 배롱나무를 확인할 수 있다.
전라남도 담양은 가사문학의 고장이자 원림의 고장이다. 그 중 명옥헌은 배롱나무가 지천인 곳이다. 뜨거운 여름 햇볕을 받아가며 관광객들이 모이는 이유도 바로 배롱나무 때문이다. 사진은 명옥헌 앞 연못이며, 연꽃 가득한 연못과 그 주변에 심어진 배롱나무를 확인할 수 있다.

정수리를 녹일 정도로 뜨겁게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은 꽃들도 버티기 힘든 계절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정오를 ‘가장 그리스적인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여름은 아침부터 이글이글 태울 듯 태양이 덤벼드니 꽃들도 힘겨워 피기를 꺼리는 시절이다.

그래서 여름 뜨거운 태양을 이겨 먹듯 피는 여름꽃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태풍이 몰고 온 비와 바람이 무더위의 기세를 한풀 꺾어 놓았지만, 올 8월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던 계절이다.

그 여름을 머리에 이고 담양의 명옥헌을 찾았다. 여름꽃 배롱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배롱나무는 여름에 꽃을 피운다. 강렬한 진홍색의 꽃이다.

물론 요즘에는 분홍색과 하얀색의 배롱나무도 있지만, 그래도 배롱의 진수는 진홍색에서 찾을 수 있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그런데 초본 백일홍이 있어서 목백일홍으로 구분하여 부르다가 언젠가부터 배롱나무라고 칭하고 있다.

백일홍은 또 자미화라고도 불리는데, 꽃의 색을 강조한 이름이다.

중국 송나라의 시인 양만리는 “누가 꽃이 백일 동안 붉지 않고, 자미화가 반년 동안 꽃핀다는 것을 말하는가”라고 노래한 바 있다.

세상의 많은 꽃이 열흘을 피우지 못한다. 그래서 흔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말하는데, 양만리는 백일 동안 피우는 배롱을 보며 ‘화무백일홍(花無百日紅)’이라 노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배롱나무의 꽃은 백일 동안 피는 것일까. 꽃송이 하나가 백일을 피어 있기는 힘들다.

조선 중기 오이정이 은둔하며 살기 위해 아버지 오희도가 살던 곳에 정자를 세우고 명옥헌이라 이름을 짓는다. 사진은 명옥헌 정자이며 정자 앞으로 연못이 있으며 주변 경관은 배롱나무와 적송으로 가꾸어놓았다.
조선 중기 오이정이 은둔하며 살기 위해 아버지 오희도가 살던 곳에 정자를 세우고 명옥헌이라 이름을 짓는다. 사진은 명옥헌 정자이며 정자 앞으로 연못이 있으며 주변 경관은 배롱나무와 적송으로 가꾸어놓았다.

특히 여름 그 뜨거운 태양을 이기는 것은 더욱 그렇다. 대개 나무의 꽃은 열흘 정도 핀다. 배롱나무의 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름 내내 피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수많은 꽃이 원추상의 꽃차례를 이루어 차례로 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8월이 되면 배롱나무는 남도를 장악한다. 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사방에 진홍색 배롱꽃이 만발한다.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서울 경기 지역에서도 배롱나무를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서울의 대표적인 배롱나무는 덕수궁 석조전 앞 정원에 있다.

건물 양쪽으로 가지를 넓게 펼친 모습이 이채로운 나무다.

이렇게 남도에서 흔히 만날 수 있고,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배롱나무를 만나기 위해 굳이 전라남도 담양을 찾는 까닭은 달리 있다.

특히 명옥헌 원림은 배롱에 의한, 배롱을 위한 원림으로 조성됐기 때문이다. 조선 중엽 명곡 오희도가 살던 곳을 그의 아들 오이정이 은거하며 살기 위해 정원을 만들면서 명옥헌의 역사는 시작된다.

여섯 그루의 신령스러운 왕버들나무가 심어있는 큰 저수지를 지나면 명옥헌의 초입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이정이 정원을 만들기 위해 판 연못 주변에는 온통 배롱나무가 심겨 있다.

게다가 배롱의 진홍색 꽃 색깔을 시샘하듯 연꽃도 한창이다. 마치 연꽃과 배롱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이처럼 명옥헌 원림은 배롱나무로 가꿔놓은 정원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배롱나무 천지다.

연못을 지나 조금 비탈을 오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원림의 주인공 ‘명옥헌’이다.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꽃이 활짝 핀 여름에도 좋지만, 꽃은 물론 줄기의 껍질까지 벗어내는 겨울에도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눈 내린 명옥헌을 찾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남도의 절집과 고택, 그리고 서원 등에서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배롱나무는 뜨거운 여름 한철 화려하게 꽃을 피우지만, 그 나머지 기간은 헐벗은 모습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절집의 승려들은 이런 배롱나무를 보며 무소유의 마음을 읽어내려고 했으며, 서원의 선비들은 이 모습에서 청렴한 선비 상을 그려냈다.

명옥헌을 세운 오이정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헐벗은 배롱의 본질을 사랑한 까닭에 정자를 세우고 주변을 온통 배롱으로 채웠을 것이다. 그래서 여름꽃을 보면서 겨울 배롱을 연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의 일인듯싶다.

저작권자 © 대한금융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