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문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 연구위원 / SN경영연구원장 / 경영학박사

매년 수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거나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다. 퇴직의 경우,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단지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퇴직한 선배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는 순간 밀려오는 충격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은퇴가 주는 충격

은퇴 후 한동안은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그런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숨을 돌리고 나서, 은퇴 생활의 이점들을 하나씩 꼽아본다. 우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 시간이 늘어났다. 직장생활 내내 따라붙던 실적에 대한 부담도 사라졌다. 틈만 나면 숨 막히게 굴던 상사와 마주치지 않으니 살 것 같다. 마음 놓고 느긋하게 아침잠을 즐길 수도 있다. 이런 게 은퇴자의 특권인가 싶다.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오던 월급이 거짓말처럼 끊겼다. 따르던 직원들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일찍 일어나도 출근할 곳이 없다. 직장에선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믿었건만, 한순간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숙맥(菽麥)이 되었다. 지금껏 든든하게 지켜주던 울타리가 벗겨지니, 허허벌판에서 맞닥뜨리는 삭풍이 매섭기 짝이 없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당혹감에 온몸을 떤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뀐 현실을 실감한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든 게 흐릿하다. 뭐라도 배워야 할 것 같긴 한데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창피하다. 어느 것 하나 똑 부러지게 정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자신이 안쓰럽다.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은퇴 전에 미리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도 해보지만 이제 와 무슨 소용이랴. 덜컥 겁이 난다.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느낀다. 툭하면 화를 내고 핏대를 올린다. 출세한 후배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기분이다. 자신을 밀어내고도 잘만 돌아가는 세상이 야속하다. 속절없이 도태되어가는 느낌이 정말 싫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럴 땐 주변 사람들의 위로조차 별 도움이 안 된다. 

노령화 시대의 은퇴 생활 

은퇴 후의 삶이 더 힘들어진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의 수명(壽命)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유례없는 ‘노령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은퇴 후 살아가야 할 날들이 엄청나게 길어졌다는 말이다. 오래 사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마냥 반길 수도 없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는 노령화 사회는 자칫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그런 현상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은퇴자들의 상당수는 남아 있는 세월을 살아낼 경제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평생 몸 바쳐 일하던 직장에서 나온 후에도 계속 일하길 원한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을 기다리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그것이 노령화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다. 그렇다면 그들의 여생은 어찌 되는 건가? 더 일해야 하고 일하고 싶은데,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니.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노령화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심각한 사회문제다. 나라에서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골치 아픈 난제다. 이처럼 뾰족한 대책이 없는 가운데, 매년 수많은 은퇴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렇다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 같은 엄혹한 현실이 가뜩이나 위축된 그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마음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 

은퇴 후에 가장 시급한 것이 ‘인식의 전환’이다. 이전과 전혀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변화된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지금껏 누려왔던 것들이 당연한 권리가 아닌 특별한 행운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소확행(小確幸)’을 배우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항상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심리적인 독립도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은퇴 후에 곁에 사람이 없음을 한탄한다. 괜히 우울해하고 심하게 외로움을 탄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고독하다고 다 외로운 것도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특히 은퇴 후에는, 남들의 위로에 기대지 말고 정신적으로 자립하는 방법을 깨우쳐야 한다.

겸손과 관대함을 배워라. 후배나 젊은 사람들을 대할 때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짓은 금물이다. 주제넘은 충고나 조언은 인간관계마저 해칠 수 있다. 그런 행동을 자주 할수록 구제불능의 꼰대가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을 피하게 된다.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던 아집을 과감하게 내려놓으라. 비로소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라. 지금까지 엄두를 내지 못 했던 것들에 도전하라. 가슴이 뛰는 거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오랫동안 숨겨왔던 열정을 불러내라.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아라. 자신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라. 언젠가 찾아올 찬란한 보상을 맘껏 상상하라. 당당하고 의연하게 현실에 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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