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를 기리며 양산보, 10년에 걸쳐 원림(園林) 조성
대나무와 소나무 울타리 안에 동백 오동 산사 등 심어

스승 조광조를 기리며 양산보가 낙향후 10년에 걸쳐 만든 원림 ‘소쇄원’. 이 원림의 입구는 대나무 숲이 감싸 안은 듯한 분위기다. 대나무 숲을 지나 소쇄원 공간에 들어가면 자연 속에 제월당과 광풍각이 그림에 어우러지게 들어서 있다.
스승 조광조를 기리며 양산보가 낙향후 10년에 걸쳐 만든 원림 ‘소쇄원’. 이 원림의 입구는 대나무 숲이 감싸 안은 듯한 분위기다. 대나무 숲을 지나 소쇄원 공간에 들어가면 자연 속에 제월당과 광풍각이 그림에 어우러지게 들어서 있다.

우리는 흔히 잘 가꿔진 집안의 뜰 공간을 정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원은 우리의 미학도 아니고 우리의 언어도 아니다. 

우선 우리는 사람의 손을 타더라도 자연을 최대한 돋보이도록 노력한다. 사람의 손보다는 자연이 우선한다는 뜻이다. 

절터가 됐든 서원 자리가 됐든 인위적으로 더 가꾸기보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과한 부분은 덜어내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무와 화초가 잘 가꿔진 집안의 공간을 우리는 정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일제 강점기부터다. 그 이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했던 우리 말이라고 생각하고 이 단어를 쓰고 있다.

우리는 ‘정원’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이전에 여러 단어를 쓰고 있었다. 형태에 따라, 성격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달랐다. 

가원(家園), 임원(林園), 화원(花園), 임천(林泉), 원림(園林), 궁원(宮苑) 등의 단어가 그것이다. 

우리가 쓴 단어와 정원의 차이는 사람 손의 개입 정도일 듯하다. 

도시 속에 인위적으로 조경을 해 자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정원이라면, 원림은 자연 상태를 유지하면서 최소한으로 정자와 집칸을 배치해서 자연이라는 그림 안에 사람의 흔적이 들어가는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담양에는 기묘사화의 최대 희생양이었던 조광조를 기리며 조성된 원림 하나가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원림이라고 할 수 있는 소쇄원이 그 주인공이다. 

한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게 대숲이 출입구가 돼 햇살을 막아주고 개울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바람을 맞아준다. 

이와 함께 느티나무와 동백과 오동 그리고 배롱나무 등이 진을 치고 있고, 흰 겨울 끝을 알리는 봄의 전령사인 매화와 여름을 알리는 산사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원림을 구성하고 있다.

무등산 오른쪽 담양 땅에는 소쇄원, 명옥헌 등의 원림과 식영정, 취가정, 환벽당 등의 정자가 길을 따라 이어 달리듯 배치돼있다. 

현재를 사는 이들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남긴 시가 문학에 방점을 찍고 있는데, 이것 또한 원림과 정자를 중심으로 호남의 선비들이 시문과 풍류를 즐긴 결과이다. 

소쇄원은 그중에서도 사림파가 무참하게 짓밟혔던 기묘사화의 결과물이다. 

소쇄원의 건물은 화려하지 않다. 자연을 넘보지도 않는다. 계곡을 두고 건물이 들어서는 곳에 땅을 돋우어 짓고 나무와 계곡은 건들지 않았다. 사진 속 건물은 ‘광풍각’이다. 이른 봄 소쇄원은 매화향이 진동하고 한 여름은 배롱나무 꽃가 지천이다. 가을의 풍광은 단풍이 깃들어 화려하기까지 하고 눈내린 겨울은 흑백필름이 주는 단아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소쇄원의 건물은 화려하지 않다. 자연을 넘보지도 않는다. 계곡을 두고 건물이 들어서는 곳에 땅을 돋우어 짓고 나무와 계곡은 건들지 않았다. 사진 속 건물은 ‘광풍각’이다. 이른 봄 소쇄원은 매화향이 진동하고 한 여름은 배롱나무 꽃가 지천이다. 가을의 풍광은 단풍이 깃들어 화려하기까지 하고 눈내린 겨울은 흑백필름이 주는 단아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대사헌으로 있던 조광조가 훈구파에 의해 유배를 떠나고 결국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1519년에 일어난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현량과에 급제했던 양산보(1503∼1557)는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와 10년에 걸쳐 소쇄원을 짓는다. 

5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고향을 벗어나지 않고 은둔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소쇄원의 핵심공간은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제월당(霽月堂)’ 그리고 계곡 가까이에 지은 ‘광풍각(光風閣)’이다. 

양산보는 도연명과 주무숙 등을 흠모해서 그들의 책을 애독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소쇄원의 중심 건물의 이름인 ‘제월’과 ‘광풍’도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무숙을 인물평한 “흉회쇄락(胸懷灑落) 여광풍제월(如光風霽月)”에서 따온 것이다.

뜻은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밝은 날의 달빛과도 같다’이다. 

스승 조광조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산보는 소쇄원을 청명한 하늘과 티끌 하나 없는 달빛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양산보였기에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내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니 소쇄원을 팔거나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 주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소쇄원은 지난 1975년 전라남도 지정문화재가 됐고 1983년에는 사적 304호로 지정됐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너럭바위로 흐르는 계곡의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면서도 물살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나무 홈통과 수차를 이용한다. 

소쇄원에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인간사는 잊게 된다. 겨울 소쇄원은 눈을 이고 있는 정자를 보는 재미가 일품이다. 

활엽수를 제외한 나무들은 모두 푸른색 옷을 입고 있어 늘 푸른 숲에 와 있는 착각도 일으킨다.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자신의 정신적 의지처를 만든 남도 선비의 정신은 이런 곳에서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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