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보호수 1만4천여 그루 중 절반 넘는 7천 그루나 돼
나무 재질 좋아 절집 기둥 물론 밥상, 장롱 등 가구로 사용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의 노거수 중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전국에 걸쳐 많이 자라고 있다. 넓은 그늘을 만들어줘 정자나무가 돼 주기도 하고,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안에 있는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의 노거수 중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전국에 걸쳐 많이 자라고 있다. 넓은 그늘을 만들어줘 정자나무가 돼 주기도 하고,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가 되기도 한다. 사진은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안에 있는 느티나무다.

정자나무라고 있다. 집 근처나 길가에 있는 큰 나무로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해 그 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놀거나 쉰다는 뜻에서 정자의 역할을 하는 나무라는 뜻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이 나무는 그래서 햇볕이 강해지는 늦봄부터 가을 초입까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젓는다/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안이다/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

권혁웅 시인의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도 재워줄 것처럼 그늘이 촘촘한 느티나무. 

그 넓은 그늘에선 갓난아이가 낮잠을 자기도 하고, 마을 소식 궁금한 이들에겐 소통의 창구가 돼줬고, 이야기에 굶주린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마을의 오랜 이야기나 옛날이야기를 듣는 공간이었다.

다른 나무보다 생육 속도가 빨라서 늙은 티를 내는 나무로 보였고, 그래서 느티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이 나무는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정자나무로 불린다. 

이유는 노거수 중 가장 많은 숫자가 느티나무이니, 전국 어디에서나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확인할 수 있다. 

전국의 노거수 1만4000 그루 중 절반이 느티나무이고 천연기념물도 소나무와 은행나무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이렇게 느티나무가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지명에서도 느티나무의 흔적은 자주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충북 괴산이다. 

얼마나 느티나무가 많았으면, 군의 이름이 느티나무 산이라고 칭해졌을까. 그래서 괴산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만 90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이 밖에도 대전에 있는 괴곡동, 안동시와 김해시의 괴정리도 느티나무 괴(槐)자를 쓰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차용이겠지만, 느티나무는 조선시대 유학의 세계관에서 회화나무를 대신한다. 

회화나무를 괴목(槐木)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서원에 은행나무를 대신해서 유학의 세계관을 반영한 나무로 심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느티나무가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까닭은 성리학 때문은 아니다. 

나지막한 동산이든 널찍한 들판이든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 느티나무는 전국에 폭넓게 산재해 있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리고 재질이 좋아 쓰임새가 많았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살아서 정자나무가 돼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줬고, 특별한 절기에는 당산나무가 돼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이 됐으며, 죽어서는 건물의 기둥에서부터 소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쓰임새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했다.
 

성리학의 세계에선 회화나무와 같이 선비의 표상처럼 받들어지는 느티나무. 그래서인지 서울의 궁궐에도 느티나무는 많이 자라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사진은 창덕궁에 있는 나무다.
성리학의 세계에선 회화나무와 같이 선비의 표상처럼 받들어지는 느티나무. 그래서인지 서울의 궁궐에도 느티나무는 많이 자라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사진은 창덕궁에 있는 나무다.

느티나무의 목재는 황갈색의 무늬와 색상을 가지고 있다. 단단하며 고운 결을 가지고 있어 마찰과 충격에도 강한 나무다. 

그래서 우리나라 나무 중 목재로 좋은 평가를 받는 나무다. 

우선 기둥으로 쓰인 사례를 살펴보자. 다들 알고 있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과 해인사의 8만대장경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전, 구례 화엄사의 대웅전, 부여 무량사의 극락전 기둥은 모두 느티나무로 만들어졌다. 

가구재로도 느티나무는 활용도가 많았다. 

조선시대의 뒤주나 궤짝, 장롱, 밥상, 탁자와 사찰에서 사용하는 구시(행사 때 사용하는 큰 밥통)에 이르기까지 적용 범위가 넓었다. 당연하게도 느티나무는 밥상으로도 사용됐다. 

조선 후기에 널리 쓰인 소반 가운데 개다리 소반은 충주에서, 그리고 호족반은 나주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울과 중부 지역에서는 은행나무 상판 다음으로 느티나무 상판의 소반을 쳐줬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보태 불씨를 만드는 재료로도 느티나무는 역할을 맡았던 듯하다. 

중국에서는 왕이 계절에 따라 불씨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건네줬는데, 겨울에는 느티나무 조각을 마찰해 불씨를 만들었고,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여름에는 대추나무로 불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그러니 동아시아에선 느티나무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큰 키의 느티나무가 보고 싶으면 가까운 창덕궁과 창경궁을 찾으면 된다. 남산에도 수령이 제법 되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대략 200년은 넘긴듯하다. 

낙엽을 떨궜지만, 한여름 그늘을 만들어줬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 나무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줬는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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