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함평 농민들 약속 안 지킨 농협과 3년간 투쟁
고구마 대신 타피오카가 희석식 주재료로 부상하게 돼

고구마는 1980년 이후 술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다.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점도 있지만, 고구마향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다. 하지만 최근 희석식 소주업계가 아닌 증류주 업계에서 고구마를 술의 재료로 사용해서 소주를 만들고 있다. 사진은 합정동에 있는 요리술 전문 판매점‘주류사회’에서 팔고 있는 고구마 소주(‘려’와 ‘필)들이다.
고구마는 1980년 이후 술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다.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점도 있지만, 고구마향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다. 하지만 최근 희석식 소주업계가 아닌 증류주 업계에서 고구마를 술의 재료로 사용해서 소주를 만들고 있다. 사진은 합정동에 있는 요리술 전문 판매점‘주류사회’에서 팔고 있는 고구마 소주(‘려’와 ‘필)들이다.

요즘은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물고구마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하나 있다. 

엄혹한 것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시절,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통령은 임기를 종신직으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폭압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무소불위의 권력을 그는 술 취한 망나니의 칼처럼 휘둘렀다. 

그래서 봄이 와도 봄을 느낄 수 없었던 암울함은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정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정권의 말년에 권력의 몰락을 가져온 첫 번째 도미노가 되어준 사건이 일어난다. 

전라남도 함평에서 시작된 농민들의 시위는 광주까지 올라와 정부와 농협을 상대로 3년간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름하여 ‘함평고구마사건’이다. 긴급조치를 포함한 초법적인 행정조치로 언론과 대학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그래서 대학가의 시위는 원천 봉쇄되기 일쑤. 그런 엄혹함을 뚫고 남도 끝에서 민주화를 향한 훈풍이 불어온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76년의 일이다. 농협은 소주 주정용 재료인 고구마를 함평 농민들에게 구매한다고 발표했다.

 전라남도 함평군은 해남·무안과 함께 고구마의 대표적인 산지로써 당시 연간 2만여 톤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는 풍년이 들어 약 2만5,000톤 정도가 생산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수확량이 늘면 가격이 걱정되는 것이 농민들의 심정인데 때마침 농협에서 전량 수매를 약속하고 심지어 수매가격도 17.4 퍼센트를 인상하겠다고 발표한다. 

지금에야 농협이 하는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며 듣는 농부들이지만,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농협은 정부와 다름없다고 여겼기에 농민들은 약속을 굳게 믿고 수매를 기다린다. 

그런데 약속한 시기가 되어도 농협은 움직임이 없었고 농민들의 요청은 썩은 고구마 취급을 받으며 묵살되었다.  

고구마는 1960년대와 70년대까지 소주 주정을 만드는데 사용된 핵심 재료 중 하나다. 하지만 값싼 수입산 타피오카가 들어오면서 고구마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사진은 박재서 명인 안동소주의 전시관에 있는 1960년대 소주들이다. 좌측에 있는 소주는 제비원안동소주로 일제강점기 때 유명세를 떨쳤던 소주다.
고구마는 1960년대와 70년대까지 소주 주정을 만드는데 사용된 핵심 재료 중 하나다. 하지만 값싼 수입산 타피오카가 들어오면서 고구마는 설자리를 잃게 된다. 사진은 박재서 명인 안동소주의 전시관에 있는 1960년대 소주들이다. 좌측에 있는 소주는 제비원안동소주로 일제강점기 때 유명세를 떨쳤던 소주다.

“이름은 있어도 모습이 없는/너는 눈먼 백성/외쳐도 외쳐도 소리가 없이/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이/오늘은 어느 창고 구석에 처박혀/남도의 목마른 가을은 썩어가느냐”

시인 문병란이 1979년에 남긴 〈함평고구마〉의 한 구절이다. 

시인의 언어처럼 당시 농민들은 이름은 있어도 모습이 없었고, 심지어 눈까지 먼 백성 취급을 받았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라면 저곡가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그래야만 도시로 돈 벌러 나간 자기 자식들이 편히 살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그렇게 믿고 따랐는데, 기가 막히게 배신을 당하고 만다. 결국 농민들은 가톨릭농민회와 함께 집단행동에 나선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은 1976년 11월부터 1978년 5월까지 계속된다.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기 1년 전까지 진행된 싸움은 결국 농민들이 승리하게 된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 농협의 거짓말이 드러나게 되고 농민들은 손해를 보상받았다.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농협은 주정회사와 중간상인과 결탁해서 중간상인을 통해 산 고구마를 농민들에게 직접 수매한 것처럼 꾸몄고, 1976~77년 2년 동안 농협자금 80억 원을 유용한다. 

이러한 비위에 책임지고 농협 도지부장과 중앙회장, 단위단체장 등 모두 658명이 해임 또는 징계를 받게 된다. 

이렇게 끝난 함평고구마사건은 결국 주정 재료를 바꾸는 계기가 된다. 

1950년대 말, 우리는 값싼 당밀도 수입하기 어려울 만큼 외환 사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술을 만들기 위해 당밀을 수입해야 한다는 것은 정책결정자로서도 명분이 서지 않았던 일이다. 

결국 당밀의 수입보다는 고구마 농사 독려로 정책 방향이 바뀌어 1960년대는 고구마가 소주 주정의 핵심 재료가 되었다. 

물론 작황에 따라 들쭉날쭉한 생산량을 고려하여 부족분은 농림부의 추천을 받아 당밀을 수입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1960~70년대는 고구마와 당밀을 병용하며 주정을 만들었던 시기다. 

물론 1970년대에는 유연성이 생겨서 잡곡과 쌀, 보리 등도 적정 저장연도가 지나면 주정의 원료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다가 ‘함평고구마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농협의 고구마 수매는 1975년에 재개된 사업이다. 

그런데 사업 1년 만에 농협 내의 비리로 이 제도는 1980년에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고 국내산 고구마가 주정 원료로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제도를 보완해서 주정회사에서 수매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1973년부터 본격 수입되었던 타피오카(열대돼지감자)가 주정의 핵심 재료가 되면서 고구마는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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