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통치자금 마련하려 주세 신설, 국세 30% 거둬
30만 넘던 가양주 면허, 1930년대 중반 한 곳도 없어

일제 강점기에 들어 전통주는 수난의 역사를 겪게 된다. 가양주를 없애기 위해 일제는 주류면허제를 운영했고, 중반 이후에는 가양주 면허 자체를 없앴다. 사진은 일제 시기에 사용한 술 용기이다. 이름은 ‘술춘’이라고 한다. 증류주를 담아 유통할 때 사용하기도 했고 청주를 담아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은 완주에 있는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의 술춘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전통주는 수난의 역사를 겪게 된다. 가양주를 없애기 위해 일제는 주류면허제를 운영했고, 중반 이후에는 가양주 면허 자체를 없앴다. 사진은 일제 시기에 사용한 술 용기이다. 이름은 ‘술춘’이라고 한다. 증류주를 담아 유통할 때 사용하기도 했고 청주를 담아 사용하기도 했다. 사진은 완주에 있는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의 술춘이다.

1916년, 한국의 맥과 정기를 끊으려고 경복궁에 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한 일제는 그해 자가 소비용 술의 양조를 완전히 막기 위해 주세령을 시행한다.

주세령은 1909년의 주세법과 확연하게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생산량의 최저한도를 정해서 소규모 양조장을 자연스럽게 정리하고자 했다. 따라서 대형 양조장은 살아남지만, 소규모 주조업자는 강제로 정리된다.

주세를 관리하는 행정력도 소수의 대형 양조장만을 관리하면 됐기 때문에 효율성은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가양주를 빚어 집에서 사용하려는 곳들도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목적을 더 빠르게 달성하기 위해 주세령은 자가용 주조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주세법보다 한결 강화된 형태로 우리 술 시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법령인 것이다. 

즉 주세법은 주조 면허제와 주세의 부과, 주조장의 기업화 등 주조업에 대한 통제와 세원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법이라면, 주세령은 자가용 주조를 금지해 양조업을 기업화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지어 우리의 정신을 훼손하려 했던 것처럼 주세령을 통해 수천 년의 역사 속에 문화로 자리하고 있는 우리 술을 무대에서 강제로 퇴장시키려 했다.

게다가 거둬들인 주세는 조선에 대한 통치자금으로 사용되는 이중의 목적을 총독부는 주세령을 통해 달성한 것이다. 

이렇게 주세령이 시행되면서 30만 명이 넘던 자가용 주조 면허는 급격히 줄어 1931년이 되면 1명이 된다. 

그리고 결국 1934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자가용주 면허는 완전히 폐지된다. 이와 함께 그동안 특별히 규제하지 않았던 누룩과 국(입국)에도 면허제도를 도입한다.

우선 1919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판매용으로 만든 국과 누룩을 만드는 작업장도 면허를 받도록 했고, 밀조주 자체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1934년 개정을 통해 자가 소비용 누룩의 제조에 대해서도 면허제도를 신설한다.

누룩은 술의 품질과 맛을 결정하는 핵심 재료이다.

그런데 이를 면허제로 전환하고 집약시키면서 누룩의 다양성은 사라지게 된다. 

더욱이 가양주를 위한 누룩 제조를 금지한 것은 누룩이라는 문화를 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든 것이었다.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에는 근대 이후 우리 술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양조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소곡주 양조통이다. 소곡주는 충남 서천의 한산면에서 주로 담는 백제의 술이다. 제조통의 크기는 높이 173cm, 둘레가 540cm에 이른다. 앞에 보이는 작은 통은 계룡주조장의 용기이다.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에는 근대 이후 우리 술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다양한 양조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소곡주 양조통이다. 소곡주는 충남 서천의 한산면에서 주로 담는 백제의 술이다. 제조통의 크기는 높이 173cm, 둘레가 540cm에 이른다. 앞에 보이는 작은 통은 계룡주조장의 용기이다.

즉 1934년 주세령 개정은 가양주와 전통 누룩 모두에게 사형 선고를 한 셈이다. 

결국 주세령이 개정되면서 일제가 원하는 가양주는 사라지게 되고 양조산업은 대자본 중심으로 재편된다. 

또한 그동안 도와 부, 군 등의 행정관청에서 담당해 왔던 주세를 세무서로 이관한다. 

술은 더 이상 행정이라는 측면에서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금이라는 관점에서 관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셈이다. 

그 결과는 거둬들인 주세 총액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총 조세수입의 1.4%(1909년)였던 주세는 1919년에는 8.2%가 됐고 1929년에는 27.6%로 크게 늘었다.

이어 1934년이 되면 29.5%로 전체 조세수입에서 항상 1위를 기록했던 지세를 따돌리고 1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5년에는 30.2%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는다. 

주세 수입이 이처럼 늘어날수록 자가용주는 모두 사라져갔으며, 세상의 모든 술은 판매용으로 만들어진 술만 존재하는 세상이 돼갔다. 

1934년은 일제의 모든 정책이 대륙침략에 초점을 맞춰져 있었다. 이태 전에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만들었던 일제는 1934년에 농지령을 공포한다.

명목은 소작농의 지위를 안정시키고 소작지의 생산력을 증진한다는 것이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잦은 소작쟁의로 인한 사회적 불안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대륙침략의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농지령을 발표했지만, 실제 진행은 지주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어찌 되었든 농지령을 발효하면서 사회적 불안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 일제는 이듬해에는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한다.

문화적으로 일본에 복속시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반발할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어제도 힘들었지만, 내일은 더 고단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비정상적인 일상의 시대였다. 그래서 현진건은 1921년 발표한 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서 다음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야. 요사이는 좀 낫지마는 처음 배울 때에는 마누라도 아다시피 죽을 애를 썼지. 그 먹고 난 뒤에 괴로운 것이야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먹은 것이 다 돌아올라오고… 그래도 아니 먹은 것보담 나았어. 몸은 괴로와도 마음은 괴롭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꾼 노릇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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