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약주’라 하지 말고, 우리 ‘청주’라고 부르자
정종은 일본 사케 상품명, 아직도 명칭 혼동해 사용

쌀과 누룩, 그리고 물로 빚은 우리 술은 다 익으면 용수를 넣어 맑은 부분을 청주로 뜨고 나머지 지게미 부분에 물을 더해 탁주(막걸리)를 거른다. 사진은 당진의 면천두견주로 맑은 술을 걸러내 진달래를 띄운 모습이다.
쌀과 누룩, 그리고 물로 빚은 우리 술은 다 익으면 용수를 넣어 맑은 부분을 청주로 뜨고 나머지 지게미 부분에 물을 더해 탁주(막걸리)를 거른다. 사진은 당진의 면천두견주로 맑은 술을 걸러내 진달래를 띄운 모습이다.

술이 다 익은 뒤 용수(술을 거르는 전통 도구)를 박아 맑은 부분을 취하면 청주가 되고 흔히 지게미라 부르는 섬유질 부분에 물을 타서 거르면 막걸리라 부르는 탁주가 된다.

즉 한 술에서 청주와 탁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술의 이런 특징을 잘 살린 시가 한 편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1566∼1628)이 지은 시조다.

술이 몇 가지요

청주淸酒와 탁주濁酒이로다

먹고 취할 선정 청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風淸한 밤이거니

아니 깬들 어떠리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술을 즐기고자 하는 선비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시조다. 

취하고자 마시는 술에 맑고, 탁함이 무슨 관계냐며 청주든 탁주든 마시자고 한다. 

그리고 달이 떠 있는 바람 좋은 밤인데 술이 깨지 않으면 어떠냐고 바싹 다가서듯 술잔을 들이미는 모습이다.

좋은 벗과 기분 좋게 마시는 술자리에 관조까지 끼어들었다. 맑고, 탁한 우리 술을 신흠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조의 첫 장은 “술이 몇 가지요”로 시작지만, 답은 이내 청주와 탁주 둘이라고 자문자답한다. 

조선시대에 쓰인 고조리서에는 수백여 종의 술 이름이 적혀 있지만, 명쾌하게 구분한다. 앞서 설명한 다 익은 술을 거르는 방법에 따른 분류 기준이다.

게다가 신흠은 “청탁이 관계하랴”라며 청탁의 구분 없이 술을 즐기려 한다. 

맑은 술 청주는 재력을 갖춘 관료들의 술이라면 탁한 막걸리는 백성들의 술이다. 이런 구별이 자신에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술이 가진 이런 특징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집에서 술 빚는 가양주 문화가 사라진 탓이다. 

술을 빚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우리 술을 만드는 과정을 모를 것이고 익은 술을 거르는 과정을 보지 못했으니 우리 술의 형태도 구분하지 못한다. 

어디 이뿐이랴. 형태를 모르다 보니 우리 술을 구분하는 기준도 알지 못한다. 우리 술은 만드는 방법에 따라 순곡주(곡물로만 빚은 술)와 가향주(부재료로 향은 넣은 술)로 구분된다. 

여기에 약용으로 쓰기 위해 약재를 넣어 빚으면 약용곡주와 약용가향주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술 거르는 방법으로 구분하면 앞에서 설명했듯이 청주와 탁주로 나뉜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맑고, 탁함을 나누지 않고 익은 술 전체를 하나로 거른 ‘합주’라는 술이 있다. 

이처럼 관점에 따라 우리 술도 다양한 분류가 가능하다. 그런데 당대에 쓰였던 단어로 술을 구분하면 청주와 탁주 외에 약주가 더 추가된다. 

술이 다 익으면 술덧으로 넣었던 고두밥이 가라앉는다. 사진은 안동 금계당의 ‘별바랑’ 술을 빚은 발효조의 모습. 고두밥이 거의 가라앉은 상태다. 이 술을 맑게 거른 후 차례 및 제사에 제주로 올린다.
술이 다 익으면 술덧으로 넣었던 고두밥이 가라앉는다. 사진은 안동 금계당의 ‘별바랑’ 술을 빚은 발효조의 모습. 고두밥이 거의 가라앉은 상태다. 이 술을 맑게 거른 후 차례 및 제사에 제주로 올린다.

분류법이 전혀 다른 류의 술 이름이다. 술의 형태가 아닌 술의 쓰임새에 방점이 찍힌 술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언어에서는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주가 97번, 약주가 42번 인용되어 있다. 약주는 태종 재위기에 총 31번, 그리고 청주는 세종 재위기에 총 55번 등장한다.

주로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있고 그것도 태종과 세종에 몰려 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청주와 약주의 시기별 사용빈도를 추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청주는 선물목록 등 공식적인 분류에 주로 사용되었다면 약주는 왕의 건강을 위해 권하는 술의 대명사로 쓰였거나 금주령을 피하고자 약용을 강조하였을 때 사용되었다.

즉 청주는 술의 실제적 구분을 위해 사용한 술 이름이라면 약주는 술에 대한 높임말의 의미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여왔던 우리 술 이름 하나가 갑자기 일본술로 둔갑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의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일제는 주세법을 반포(1909)한다. 이 과정에서 이때까지 잘 쓰고 있던 청주가 일본술이 된 것이다. 

일제는 우리 술의 범주를 조선주라는 이름으로 묶고 그 아래 탁주와 약주 등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우리 술 이름 청주는 일본주인 사케에 붙여진다. 사실상 우리 술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청주가 하루아침에 일본 술 이름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우리의 의사결정이 아니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해방이 된 지 7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적용되고 있다. 

우리 술 이름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주세법이 개정되었지만, 우리 전통 청주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홍길동’같은 신세가 된 것은 우리 술을 몸으로 체득하지 못한 결과이다.  

차례나 제사에 쓰이는 술은 우리 술 청주다. 그런데 아직도 정종을 청주로 이해하고 차례주나 제주로 올리는 경우가 빈발하고 있다.

정종은 일본 사케의 상품명인데도 여전히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차례주에는 어떤 술들을 썼는지 되새겨보자. 그래야 우리 술 청주가 제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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