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으로 인생항로 열어가는 진취적 모습으로 해석
프로스트의 시, '후회 없이 선택한 길을 걸으라는 것'

누구에게나 가지 않은 길이 있다.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운명적으로 가지 않은 길과 이별을 하게 된다.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열심히 달려온 길들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 힘들거나 힘에 부치면 생각나는 것이 가지 않은 길이다.

뒤돌아볼 겨를조차 없이 걷다가 바라본 그 길은 그래서 다양한 감정이 서로 섞여 있기 마련이다.

가지 않아 ‘낯선 길’이지만,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길이어서 시선이 관대하기까지 하다.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에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라고 말했던 그 순간이 말이다.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다. 1980년대까지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지만, 지금은 아닌 듯하다. 

피천득 작가의 번역으로 기억한다. 이 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것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했던 그 시절과 잘 어울려서였을 것이다. 

진로에 대한 선택이 가장 큰 고민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시의 마지막 행에 있는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라는 구절은 큰 울림을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삶을 개척하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심지어 모범적인 태도로 보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 같다. 

그런데 1916년에 발표된 이 시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축시로 낭송될 만큼 미국인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숲속의 풍경’을 통해 ‘인생의 항로’를 보여주는 서사구조가 진취적인 모습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를 좋아하는 만큼 이 시에 대한 오해도 많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시를 통해 고무받기를 원한다. 시의 화자가 관습을 거부하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즉 화자의 신념을 통해 자유의지가 충만해지는 것이 사회적 다양성을 채워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해는 여기서 시작됐다. 

프로스트는 이 시에서 자신이 걷었던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을 등가로 보고 있었고, 그 선택 또한 임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의도를 가지고 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입추가 지났다. 하지만 아직 찬 바람 부는 한겨울이다. 물론 남쪽에서 올라오는 꽃소식은 봄을 조금씩 채워주고 있다.

양산 통도사의 지장매도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고, 거제도와 태안 천리포수목원의 매화도 꽃을 피우고 있다. 

어쩌면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도 봄기운을 채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란색 꽃을 피우는 복수초도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봄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절기의 변화는 오차가 없다. 왔으면 가는 것이 자연이다. 길 또한 걸었으면 가야 한다. 잘못된 길이면 그때라도 되돌아가서 제대로 된 길을 찾아내면 된다.

프로스트를 제대로 읽는 것은 어떤 길을 걸었든 그 길에서 후회하지 말라는 것 아닐까 싶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받아드는 우리다. 

‘결정장애’라는 단어를 우스갯소리로 사용할 만큼 결정할 일이 차고 넘치는 사회다. 그러니 매번 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 선택이 바르다는 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길을 두고 고민하다 보면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게 된다. 

프로스트의 시에서 사람들이 읽는 대목은 ‘덜 걸어간 길’이지만,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낱말이 하나 있다. ‘한숨’이다.

프로스트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디선가 나는/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에 내쉬는 한숨이다. 

미래의 한숨은 후회를 뜻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관찰자처럼 정리한다. 모든 것이 달라졌던 적게 걸어간 길에 대해서 말이다. 다들 이렇게 걸어갔고, 또 걸어가는 중이다. 

2022년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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