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 에틸알코올에 포도당액 섞어 술 만들어 마셔
6~70년대 노동판서도 됫병들이 막소주 빠지지 않아

전쟁중에도 술은 소비된다. 20세기 한가운데에서 벌어졌던 6·25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원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술은 생산되었고 소비되었다. 힘들었던 그 시절 우리 곁에 있었던 술 중에 '막소주'가 있었다. 1.8리터들이 됫병에 들어있던 술들이다.
전쟁중에도 술은 소비된다. 20세기 한가운데에서 벌어졌던 6·25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원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술은 생산되었고 소비되었다. 힘들었던 그 시절 우리 곁에 있었던 술 중에 '막소주'가 있었다. 1.8리터들이 됫병에 들어있던 술들이다.

초기 인류가 상위포식자로부터의 공포와 불안을 떨치기 위해 술을 마셨듯이, 적대적인 이웃 부족과 전쟁에 나서는 전사들은 극한의 공포심을 이겨내기 위해 제사장이 건네는 술잔을 단번에 들이키고 전쟁에 나서야 했다. 

모든 전쟁은 전투에 참여하는 병사는 물론 민간인까지 공포에 휩싸이게 만든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승패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자아내는 심리적 공황 상태가 인간을 초라한 존재로 내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더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술을 마신다. 그 술에서 자존감을 북돋는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해서다. 

지난 1950년, 한반도를 나눠 가진 남북한 상잔의 공간에서도 술은 필요했다. 

일상이 파괴된 공간은 술도 부족하기 마련이다. 당시의 상황을 담고 있는 기사 하나를 살펴보면 술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내용은 이렇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안 되어 미국 텍사스의 한 육군병원에서 갓 인턴을 마친 하비 펠프스가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새로운 배속을 받고 도착한 곳에서 의약품 등을 확인하고 무엇인가를 더 찾는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반가운 얼굴로 맞은 것은 95%의 에틸알코올과 주사용 포도당액이었다. 

세계 2차대전 참전 경험이 있던 그는 이 물질의 진정한 가치를 부산에 상륙한 뒤에 바로 확인시켜준다. 

이것으로 만든 물질은 하비가 원하는 물건을 누구보다도 더 먼저 확보하게 해줬다. 이 두 물질을 반씩 섞고 가루를 낸 비타민 2~3알을 넣으면 훌륭한 술 대용품이 됐다.  

하지만 자원이 부족했던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런 비정상적인 물질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메틸알코올까지 시장을 넘보면서 ‘가짜 양주 사건’으로 수십 명씩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가짜 술은 여전히 기승을 부린다. 

원하는 만큼의 술이 시장에 나오지 않는 데다 좋은 술은 더욱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마실 수 있는 것은 ‘막소주’라는 이름으로 팔리던 술이었다.

영화감독 임권택 씨가 1951년 부산에서 보낸 자신의 20대를 회고한 한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자신을 ‘막소주’ 인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거명한 술이 ‘낙동강’이라는 이름의 막소주였다. 아직 영화판으로 넘어가기 전 막노동판에서 마신 술은 이 막소주였다. 

당시 ‘낙동강’아라는 이름의 막소주는 피난 내려간 진로의 전신인 서광주조와 구포에 있던 낙동주조 두 곳에서 나온 듯하다. 

막소주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주류면허를 내고 정식으로 판매하던 술이었고, 또 하나는 어둠의 경로에서 유통되던 밀조주 소주였다. 

알코올 도수 30% 정도의 소주를 1.8리터들이 됫병에 담아 유통했던 술은 특히 막노동판에서 인기를 끌었다.

거친 노동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럿이 모여 됫병 소주를 맥주잔이나 양재기에 나눠 담아 마시기도 하고, 혼자 남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잔술로 덜어 마시는 장면은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소설의 단골메뉴였다. 

이문구의 소설 〈공산토월〉에서는 “큰 병에 받아다 놓은 막소주를 공기만 한 양재기에 따라” 새참으로 마셨고, 아직 주류면허를 내지 않았던 1980년대의 안동소주를 소개하는 기사에는 “코르크 마개를 꾹 질러 막은 ‘됫병 짜리’ 밀주 안동소주에 애주가들은 아주 환장했다”는 인터뷰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조옥화 명인이 살아있을 때 그의 술을 받아 가기 위해 전국구 애주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는 내용의 기사다. 

그렇다면 이렇게 줄을 서서 밀주를 기다렸던 곳이 여기만 있었겠는가. 

서천의 한산소곡주도 그렇고 조기 파시 때마다 전국의 돈이 모였다는 전남 영광의 ‘토종’ 소주도 그랬다. 

금제는 편법을 희망하기 마련이다. 오히려 더 간절했기 때문에 금제의 선을 넘나드는 것 아니겠는가. 금기의 선악과에 손을 대는 심정처럼 말이다. 

이런 야릇한 흥분을 느낄 수는 없지만, 일반 소주공장에서 나오던 됫병들이 소주도 노동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친구였다.

1960년대 중후반쯤 산업화의 깃발이 막 들리던 시절, 간척지의 노동자들이 벌였던 쟁의를 소재로 쓴 황석영의 소설 《객지》에도 막소주는 등장한다. 

“목 씨가 막소주 두 병을 들고 왔다. 다섯 사람은 소주를 양은 그릇에 따라 돌렸다.” 일과를 마치고 함바에서 저녁을 먹은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회식을 나눈다. 안주라고는 오징어 다리가 전부다. 

그러니 자연스레 진안주가 그리워진다. 

그래서 “개장국 한 그릇 걸쳤으면 후련하겠는데”라는 푸념이 이어진다. 이렇게 마신 막소주는 노동주이자 하루의 피곤을 끊어내는 휴식의 술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소주 냄새는 당대의 모든 아버지에게 맡을 수 있는 냄새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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