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문화재 금동 미륵보살 두 점 상설 전시
‘사유의 방’ 무념무상에서 미소 띠며 생각하게 만들어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마련된 ‘사유의 방’에는 국보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2점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해까지 이 반가상에는 국보 78호(왼쪽)와 83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상설전시하고 있는 이 방을 찾아간 사람이 3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엷은 미소와 부드러운 선으로 ‘사유’를 보여주는 우리의 대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마련된 ‘사유의 방’에는 국보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2점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해까지 이 반가상에는 국보 78호(왼쪽)와 83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지난해 11월부터 상설전시하고 있는 이 방을 찾아간 사람이 3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엷은 미소와 부드러운 선으로 ‘사유’를 보여주는 우리의 대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길고 어둑한 공간은 동굴을 연상시킨다. 동굴 속 공명처럼 들리는 잔잔하면서 몽환적인 배경음악을 들으며 좀 더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널찍한 광장.

수만 년 전쯤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며 각종 제의를 펼쳤을 것 같은 느낌의 공간이다. 

천장 외곽을 따라 공간의 구획을 알리는 간접조명의 불빛이 채우고 있어 윤곽을 알려준다. 작은 우주를 맞이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압도하는 것은 두 점의 미륵보살. 

어둡지만 어둡지 않은 모순의 공간에서 엷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두 점의 보살상이 관람객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440㎥ 규모의 ‘사유의 방’은 이렇게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 두 점이 무심한 듯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다. 공간을 조심스럽게 들어온 관람객은 두 점의 보살상 앞에서 숙연해진다. 

유리 케이스도 없이 관람객을 맞는 반가상.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장면에 순간 당혹해하면서도 신기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이 순간 문화재는 유물, 즉 살아남아 과거를 알려주는 존재가 아니다. 다시 살아 현대인과 호흡하며 자신의 가치를 알려주는 ‘문화’가 돼있다. 

지금은 서열을 만드는 느낌이 든다는 비판 여론에 따라 국보의 번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 같이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 불리지만, 지난해까지 두 점의 국보는 각각 제83호와 78호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이해 왔었다. 

하지만 국보 두 점을 한 번에 볼 수는 없었다. 하나가 전시되고 있으면 나머지 하나는 수장고에 있는 형태로 교차 전시됐을 뿐이다. 

물론 관람객을 한꺼번에 만난 적도 있다. 특별전시를 이유로 지금까지 딱 세 번, 두 미륵보살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지난 1986년과 2004년, 그리고 2015년 ‘고대불교조각대전’ 때 반가사유상 두 점은 그것이 화제가 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진 것이 6~7세기. 

출토된 지역과 양식에 따라 만든 국가를 삼국 중 하나의 나라로 특정할 수 없어서 언제인가부터 그저 삼국시대로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적어도 1500년 전쯤에 만들어졌으나 같은 공간에는 좀처럼 있을 수 없었던 미륵보살 두 점이다. 

이 문화재가 지난해 11월부터 한 공간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것도 상설전시의 이름으로 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이 두 점의 보살상을 택한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을 찾으면 ‘모나리자’를 먼저 떠올리듯, 우리도 엷은 미소와 ‘사유(思惟)’로 대변되는 반가사유상을 우리의 얼굴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장 놓치기 쉬운 ‘미소’와 ‘사유’ 그리고 ‘여유로움’을 일부러라도 찾아내자는 취지로 읽힌다. 

그래서 ‘사유의 방’은 메타인지처럼 ‘생각에 관한 생각’을 유도하는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부처가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마저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적한 후 56억7000만 년 후에 중생을 구제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도솔천에서 정진하고 있다고 한다. 반가부좌를 한 반가상은 그래서 긴 시간을 사유한다. 

그 사유의 핵심은 자신이 사바세계에 나타날 때까지의 먼 앞날이다. 그것은 ‘어떻게’ 일수도 있고 ‘무엇을’ 일수도 있다. 

한자로 생각을 뜻하는 글자가 몇 개 있다. 사(思)와 상(想)과 념(念) 등이다. 

사는 마음심(心)에 밭 전(田)이 올라와 있고, 상은 마음심에 서로 상(相)이, 념은 이제 금(今)이 각각 올려져 있다.

동양의 세계관에서 마음은 텅 빈 곳이다. 마음에 무엇인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은 바로 마음에 작용하여 감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마음 심에 올려져 있는 단어에 따라 모두 생각을 뜻하지만 다른 뉘앙스의 생각을 표시하게 된다. 

사(思)는 정수리 신(囟)이 변해 밭 전(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머리로 따져서 하는 생각을 말한다. 무엇인가 곰곰이 하는 생각이다. 상(想)은 형상과 함께 떠오른 생각이다.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생각 말이다. 

‘상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념(念)은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올라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반가상은 ‘사유’를 하고 있다. 

온 몸의 힘을 빼고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편하게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문 앞에서 지옥을 생각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사유의 수준과 상황이 다르다. 

바쁜 일상이지만, 가끔은 이 방을 찾아 1500년 전 조상들이 남긴 사유를 생각해보자. 

생각에 관한 생각의 도화선이 되어 줄 것이다. ‘사유의 방’ 개관 이후 30만 명이 찾았다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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