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힌다’는 메밀꽃
시인 박목월, 적막하고 쓸쓸할 때 찾는 슴슴한 맛 예찬

메밀은 가을에 심어 초겨울에 수확할 수 있는 식물이다. 겨울보리나 밀을 심은 뒤 여름녘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경우도 있다. 소설가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에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여름 경북 안동 맹게마을의 메밀밭이다.
메밀은 가을에 심어 초겨울에 수확할 수 있는 식물이다. 겨울보리나 밀을 심은 뒤 여름녘에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경우도 있다. 소설가 이효석은 '메밀꽃 필 무렵'에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여름 경북 안동 맹게마을의 메밀밭이다.

봄은 무채색 세상에 색을 입혀주는 마법을 펼쳐낸다. 그래서 메마른 일상을 벗어나고픈 마음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손꼽아 기다리는 계절이다. 

하지만 봄이 오면 겨울 제철의 이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듯하다. 

한꺼번에 모두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자연스럽게 갖게 된 체념일 것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는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메밀꽃을 묘사하고 있다. 

지금이야 이 소금꽃처럼 핀 메밀을 낭만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없이 살던 시절엔 가을에 심어 겨울 초입에 수확할 수 있는 메밀이 고맙기 그지없는 식물이었다. 겨우내 없는 살림에 큰 힘이 돼 주었으니 말을 보태 무엇하겠는가.

익은 메밀로 만들어 먹었던 겨울철 별미의 메밀묵. 20세기의 중후반을 살았던 사람들에겐 “메밀묵~ 찹쌀떡~”을 외치던 소리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도시 곳곳을 누비며 외치던 고학생의 소리는 밤이 길었던 그 시절 겨울의 배경음악이기도 했다. 추억을 소환하는 그 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들었던 사람에게 그 소리는 메밀묵만큼 구수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메밀묵을 소재로 쓴 시 중에 가장 유명한 시는 박목월의 〈적막한 식욕〉이다. 

이 시에서 목월은 “그 싱겁고 구수하고/못 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메밀묵을 노래한다.

적막하고 쓸쓸할 때 찾는, 그래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맛을 보게 되는 메밀묵이라고 시인은 이어 말한다.

요즘 메밀묵은 겨울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같이 곁들어 먹거나 국수처럼 길게 잘라 국수장국에 넣어 먹기도 하지만, 목월은 “벌건 윤즙(초고추장)을 묵에 듬뿍 찍어 먹게 되면 입 안이 얼얼하고도 구수하고 시면서 달다”고 말한다. 

이것이 묵 맛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것을 안주 삼아 뿌연 막걸리를 목 안에 부듯하게 한 사발 걸치면 제법 한량 같은 느긋한 기분”도 든다고 말한다. 

메밀묵을 즐기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가인 권오돈은 한 수필에서 메밀묵을 제육과 같이 무쳐내 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지간히 단단한 묵을 위에 덮인 껍질을 살짝 베어내고 얇고 가늘게 채로 썰어 더운물에 헹구어 내어 물기를 빼 그릇에 담고 겨울 배추김치를 가로 잘게 썰어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한참 볶다가 거기에 묵 썬 것을 섞어 넣고 무치는 것인데, 그 전에 먼저 제육을 잘게 썰어 양념을 알맞게 해 볶아 놓았다가 한데 넣고 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평양냉면집에서 볼 수 있는 ‘메밀제육’이 이와 같을 것이다.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의성식당은 100% 국산 메밀로 직접 묵을 쑤는 몇 안되는 노포다. 엄태분 여사의 친동생이 직접 농사 지은 메밀을 사용한다. 노포 안에는 앉은뱅이 식탁 3개가 고작이다. 동네 사랑방 같은 곳에서 메밀묵과 도토리묵 등의 안주류와 국수와 묵밥을 판매한다. 메밀묵은 이달말까지만 할 예정이다.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의성식당은 100% 국산 메밀로 직접 묵을 쑤는 몇 안되는 노포다. 엄태분 여사의 친동생이 직접 농사 지은 메밀을 사용한다. 노포 안에는 앉은뱅이 식탁 3개가 고작이다. 동네 사랑방 같은 곳에서 메밀묵과 도토리묵 등의 안주류와 국수와 묵밥을 판매한다. 메밀묵은 이달말까지만 할 예정이다.

메밀묵은 ‘도깨비’와 친숙하다. 연전에 방영된 드라마 ‘도깨비’에선 관련 장면이 나오지 않았지만, 도깨비가 가장 즐긴 음식은 메밀묵이다. 

도깨비에게 고사를 지낼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메밀묵과 메밀떡이었다. 

산골에서 도깨비가 잘 나오는 집이나 장소를 ‘도깨비 터’라고 한다. 이곳에도 반드시 메밀묵을 올렸다고 한다.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어촌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에서도 메밀묵과 메밀떡은 빠지지 않는다. 

이처럼 도깨비에게 메밀묵을 올린 기록은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왕실의 종묘 제사에서도 12월에는 메밀묵이 두부와 함께 올려졌다고 한다. 

이런 도깨비가 메밀묵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수수팥떡과 막걸리도 무척 좋아했던 음식이다. 도깨비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하나같이 서민적이다. 

맛도 특별하기보다는 담백하고 슴슴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유는 도깨비에 형성된 이미지가 서민지향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즐겼던 음식을 도깨비도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이 만든 풍속이다.  

도토리묵을 파는 주점은 많지만, 메밀묵을 다루는 곳은 거의 없다. 그나마 몇곳에서 메밀묵을 만날 수 있다. 

서울에선 신대방동의 의성식당 정도가 제대로 된 메밀묵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메밀가루로 묵을 쑤는 것이 아니라 직접 메밀을 내려서 매일 만든 묵이다. 

그런데 이 음식은 3월까지만 만든다고 한다. 온도가 올라가면 묵을 굳히는데도 시간이 많이 들고 여름에는 쉬이 상하기 때문에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가는 겨울이 아쉬운 사람들은 찾아가 볼 일이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메밀묵의 맛을 볼 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묵은 계절에 따라 재료를 달리하며 만들어 먹는다. 

봄이나 초여름에는 녹두로 만드는 청포묵을, 7·8월에는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을 만들어 먹었다. 

가을이 되면 지천인 도토리로 묵을 쑤어 먹었고, 메밀묵은 겨울에 주로 먹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묵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만들어도 쉬이 쉬기 때문에 겨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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