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 전란과 대기근 경험하며, 쌀 식량 중요성 인식
사대부 계급의 사치·술 유흥 문화 막고자 금주령 발효

어깨가 넓게 벌어져 매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서 ‘매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한자는 매화 매(梅)자를 사용한다. 고려부터 조선 중기까지 만들어졌고, 주로 술을 보관하기 위한 병으로 쓰였다. 사진은 ‘분청사기 백합 대나무 무늬 매병(왼쪽)’으로 조선 중기 작품이다. 이에 비해 조선중기 이후에는 주둥이가 길게 뽑아진 병을 만들었다. 흔히 술을 담는데 사용했다고 해서 ‘주병’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 백자로, 조선 말인 19세기에 만들어진 ‘백자주병(오른쪽)’이다.
어깨가 넓게 벌어져 매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서 ‘매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한자는 매화 매(梅)자를 사용한다. 고려부터 조선 중기까지 만들어졌고, 주로 술을 보관하기 위한 병으로 쓰였다. 사진은 ‘분청사기 백합 대나무 무늬 매병(왼쪽)’으로 조선 중기 작품이다. 이에 비해 조선중기 이후에는 주둥이가 길게 뽑아진 병을 만들었다. 흔히 술을 담는데 사용했다고 해서 ‘주병’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 백자로, 조선 말인 19세기에 만들어진 ‘백자주병(오른쪽)’이다.

조선시대의 영조와 정조는 당쟁을 막으려는 탕평과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정책의 시선은 비슷했지만, 술에 대한 태도만큼은 두 임금이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 덕분에 조선의 18세기는 술 때문에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금주령의 시대’이자 다양한 술들이 꽃피웠던 ‘술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우선 금주령 시대를 살펴보자.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7세기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17세기는 전 세계가 이상기후에 휩싸인 소빙하기의 시대다. 지구의 평균온도는 1~1.5℃ 정도 내려가 냉해와 습한 기후로 인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된다.

조선에서도 인구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죽는 대기근이 이 기간에 두 차례 발생한다. 

현종 때 발생한 ‘경신대기근’과 숙종 때 있었던 ‘을병대기근’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최소 인구의 10분의 1이 굶거나 병들어 죽은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전란과 두 번의 대기근, 그리고 17세기 내내 수시로 찾아온 기상이변에 따른 가뭄은 가뜩이나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최악의 순간으로 내몰았고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률까지 무너뜨리고 말았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로 을병대기근 직전인 1694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직접 을병대기근을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숙종의 재위는 소빙하기 기간 중 일부였으므로 크고 작은 기근을 수시로 겪어야 했다. 전국에서 왕에게 올리는 장계의 보고 내용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아와 전염병이 만들어낸 극한의 혼돈을 보고 경험했을 것이다. 

게다가 끊이지 않는 당쟁과 권문세가들의 사치는 영조에게 큰 숙제처럼 남은 과제였을 듯하다. 그래서 영조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금주령을 선포한다. 

영조는 《전국책》에 나와 있는 우왕의 고사와 세종의 ‘계주교지’, 그리고 숙종의 ‘계주윤음’까지 동원해 금주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영조의 금주령은 여타 임금들의 금주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영조 31년(1755) 가을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해 가을이 채 가기 전에 영조는 폭탄선언 같은 금주령을 발령한다.

이듬해부터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종묘제례의 제사에 쓰는 술도 금지돼 예주(醴酒, 단술)를 써야 했고 한양의 술집에는 주등을 걸 수 없었으며 금주령을 위반한 사람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술을 마신 선비는 과거 시험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유생명부에서 제적됐다. 

중인과 서얼의 경우는 수군으로 보내졌으며, 서민과 천민은 노비가 돼야 했다.

그런데 강력한 금주령이 발효된 1756년부터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와의 관계가 더욱 나빠진다. 

악화일로에 있던 왕과 세자의 관계는 결국 세자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이 과정에도 술이 개입돼 있었다. 

“곧 나라의 흥망이 오직 금주가 실행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는 영조의 생각은 금주령을 강화할 때마다 내비친 자신의 속내였는데, 사도세자는 이를 어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넉 달 뒤엔 함경도 북청의 병마절도사였던 윤구연이 술을 마셨다는 혐의로 탄핵당해 결국 남대문에서 참수된다. 정확한 물증도 없었으나 그의 구원을 요청한 삼정승마저 파직당하고 만다. 

그렇게 서슬 퍼런 금주법도 결국 해제된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말이다. 

사도세자와 윤구연 등이 죽임을 당한 지 5년이 흐른 영조43년(1767)에 왕은 한으로 얼룩진 금주령을 해제했다.

이 당시 영조가 왜 금주령을 해제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11년 동안 전쟁을 치르듯 유지했던 금주령은 그해 1월 종묘 제사에 나선 영조의 “예주가 아닌 술을 쓰라”는 한마디로 사라졌다. 

굳이 상황을 더 설명하자면 영조의 건강이 좋아진 것 때문이다. 

최악의 금주령을 해제하기 바로 전 해인 영조42년(1766), 영조의 관절이 무척 안 좋았던 것 같다. 

그런데 봄 여름 동안 송절차를 마시면서 관절이 좋아져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단다. 

영조는 이것을 조상의 공덕이라고 생각하고 예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효’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관절을 위해 송절차를 마셨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송절주를 송절차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건강을 회복한 것에 대한 고마움을 금주령 해제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의 금주령이 다시 내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금주령이 해제되고 3년 후인 영조 46년 1월의 기사를 보면 경연장에서 술을 마신 승지 조정에게 더는 벼슬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임금은) 주등 켜는 것을 금지했으나, 끝내 금할 수 없었다”고 그의 속내를 마지막 문장에 담아냈다. 

주등은 요즘으로 치면 술집의 네온사인이다. 

근심을 잊게 해주고 열정과 환희를 일으켜주는 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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