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그만두고 사는 재미 찾아 1인 양조장 창업
일곱쌀·아홉쌀, 그리고 열두쌀, 술 이름도 독특

은행을 다니다가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양조교육을 받고 서울 방배동에 양조장을 차린 한아영 대표.
은행을 다니다가 재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양조교육을 받고 서울 방배동에 양조장을 차린 한아영 대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재미있는 일을 하라’는 명제가 시절의 화두로 떠올랐을 때가 있었습니다.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수동적인 삶보다는 자신이 주체가 돼 주도하는 삶이라는 관점에서 ‘재미’를 말하는 것이죠. 그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술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다니던 직장은 HSBC은행이다.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이 그를 힘들게 한 것일까.

그는 사표를 내고 여행을 떠난다. 일본과 스페인. 가는 곳마다 양조장도 찾았다. 사케양조장과 와이너리. 그리고 바로 우리술 교육기관인 ‘막걸리학교’에 등록을 한다. 2017년의 일이다. 

가양주를 배우면서도 전국의 양조장을 찾아다녔다. 지방의 조그마한 양조장을 가면서 술을 마시고 양조장의 풍광을 보는데, 그렇게 좋았단다. 

특히 흰색 벽돌로 마감된 경남 진주의 ‘단성양조장’을 지날 때 동네 분들과 관광객 일부가 줄을 서서 술을 사려는 모습은 재미를 넘어 예쁘게 보였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정이현 작가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 같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안심스테이크가 포함된 디너코스를 주문하고, 하우스와인을 한 잔 시키면서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위해 이 정도의 작은 선물은 해줄 수 있어.”

보상적 소비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문학작품이다. 2006년에 신문연재로 발표됐으니, 그때부터 MZ세대는 다른 세대와 다른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최신의 트렌드를 빠르게 흡수하고 남과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소비에서도 그렇지만, 직업관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막걸리학교와 가양주연구소, 수수보리아카데미 등 다양한 술 교육기관에서 양조교육을 받은 한아영(33) 씨는 지난 2020년 서울 방배동에 조그마한 양조장을 내고 자신이 좋아하는 맛의 술을 만들고 있다. 

만든 술은 거의 전통주점과 한국술 보틀숍에 납품하고, 일부는 양조장을 찾는 사람들이 구매를 한다고 한다. 주고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접속하는 20~30대 여성들이다. 그런데 30~40대의 남성 중에서 두 손 가득 술을 사서 가는 때도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에서 작명한 듯 양조장의 이름도 ‘한아양조’다. 자신이 꿈꾸던 삶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우며 한발씩 내딛는 모습이 딱 MZ세대의 그것이다. “천복을 즐겨라”라고 말했던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제시한 삶을 실천하듯 말이다. 

한아양조에서는 3종류의 술을 생산하고 있다. 일곱쌀(왼쪽), 아홉쌀, 열두쌀. 각각 알코올도수를 의미한다. 레이블은 한아영 대표의 어린 시절 사진이다.
한아양조에서는 3종류의 술을 생산하고 있다. 일곱쌀(왼쪽), 아홉쌀, 열두쌀. 각각 알코올도수를 의미한다. 레이블은 한아영 대표의 어린 시절 사진이다.

술 이름도 재미있다. 판매하는 술은 ‘일곱쌀’, ‘아홉쌀’, ‘열두쌀’ 등 세 종류다. 알코올 도수 7도와 9도, 그리고 12도를 ‘쌀’로 표시하면서 도수와 쌀, 나이 등을 중의적으로 모아서 작명했다. 게다가 레이블은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사용했다. 유치를 빼고 난 뒤 어머니가 찍어줬다는 사진이다. 

만든 술은 남지 않고 다 팔리고 있는 걸 보면 이런 감성이 소비자들과 소통의 고리가 된 듯하다. 물론 대형 양조장에 비해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한아양조의 월 생산량은 1000병 정도. 혼자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만들 수 있는 만큼만 생산하고 있다. 

한 대표의 술은 이양주로 빚는다. 모두 멥쌀로 고두밥을 짓는다. 사용하는 쌀은 막걸리학교를 같이 다녔던, 경북 칠곡의 귀농한 농부로부터 받는다. 

통신판매를 위해서는 지역특산주 면허를 필요하지만, 혼자 하는 양조장에선 욕심을 내고 싶지 않단다. 술맛은 많이 달지 않으면서 약간의 산미를 지녔다.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산미다.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한 대표의 술과 함께 보내지는 작은 홍보지에 각각의 술에 어울리는 안주가 적혀 있다는 점. 일곱쌀에는 신선한 냉채와 오일파스타, 고트 치즈, 그리고 아홉쌀에는 견과류와 나물반찬, 젓갈류, 그리고 열두쌀에는 엔초비와 바싹 구운 베이컨 등이 나열돼 있다. 

하나하나 남편과 함께 맛을 보며 어울리는 것을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각종 전류와 우리 술은 이미 잘 어울리는데 그걸 적고 싶지는 않았어요. 외려 우리 세대가 좋아할 만한 안주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이렇게 요즘 입맛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우리 술의 미래를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대한금융신문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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