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6월 보름에 맞는 여름 쉼터 같은 휴식, 농사도 접어
풍년 기리며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에 머리 감고 몸 씻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끝났다고 생각했던 장마가 8월 들어 더 길게 찾아왔다. 좀처럼 없던 늦장마가 한반도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 이 장마가 지나면 8월의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올 것이다. 남은 복날도 말복 하나를 남기고 있다.

더위를 이기는 복달임 음식을 일부러 찾을 만큼 우리의 여름은 뜨겁고 습기 또한 많다. 그래서 날을 정해 삼계탕집과 민어탕집을 부리나케 찾는다.

대표적인 복달임 음식이니 이 식당들은 여름이면 문턱이 닳을 지경이다. 영양분이 많은 음식을 먹고 체력을 챙겨야 여름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름을 버텨야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더위를 피하지만, 여름꽃은 이파리를 태울 듯 덤벼드는 태양을 이겨 먹으려고 피는 듯하다. 절절 끓는 햇빛은 꽃살을 새까맣게 태울 기세로 덤벼들지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주황(능소화)과 진홍(배롱나무)의 빛깔을 한껏 자랑하니 말이다.

유별나도 한참 유별나다. 늦은 장맛비가 내려도 여름꽃은 지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여름꽃이 피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 그늘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곡을 찾아 나선다.

날씨가 더워 술을 찾지 않을 것 같지만, 그늘에 앉으면 생각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여름은 여름대로 술을 찾을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차갑게 칠링된 생맥주 한잔을 그리워하는 요즘 사람들처럼 계곡을 찾은 옛 조상들도 시원한 술 한잔을 찾았다.

계곡의 바람을 맞으며 정자에 앉아 연못 위에 핀 연꽃이나 배롱나무꽃을 본다면, 게다가 친구라도 찾아와 시 한 수 같이 읊조리게 된다면 자연스레 술은 대화를 이어가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이 계절에도 챙겨야 했던 명절이 하나 있다. 음력의 세상에서는 채워지고 비워지는 ‘달’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그래서 꽉 찬 보름달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매월 보름이면 이러저러한 명분을 붙여 일손을 내려놓고 그날만큼은 잔치를 열어 서로를 격려했던 것이다.

음력 6월 보름도 그중 하나다. 이름은 낯설다. ‘유두(流頭)’다. 자주 들어보지 못한 이름일 것이다. 이날은 ‘유두절’이라고도 부르고 ‘유두일’이라고도 한다.

단어의 태생은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라는 글이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다는 뜻이다. 맑은 시냇물이나 폭포에서 머리를 감고 씻으면서 피서를 즐겼는데, 이렇게 하면 불상(不祥), 즉 좋지 않은 액운을 떨굴 수 있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런 날이라면 글을 하는 선비들도 산속의 계곡을 찾아 술 한잔과 좋은 경치를 즐겼는데 이를 ‘유두연(流頭宴)’, 또는 ‘유두음(流頭飮)’이라고 불렀다. 매화꽃을 바라보며 술을 즐겼던 봄철의 ‘매화음’, 관등을 보며 술을 마셨던 ‘관등음’처럼 유두에 제철 음식과 술을 마신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유두음에 대한 기록은 고려 때 등장한다. 《고려사》에선 “병인에 시어사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함께 광진사에 모여서 유두음 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쓰여 있다. 고려 명종 15년의 기록이다.

이 글을 쓴 기자는 또한 “6월 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좋지 못한 것을 제거했고 거기에 모여 앉아 술을 마셨는데 이것을 유두음이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고려 명종 때의 문신 김극기의 ‘김거사집’이라는 문집에도 “동도(경주)에 전해 내려오는 풍속”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즉 신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오래된 풍속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이 쓴 《아언각비》라는 책에서도 유두는 유월의 세시풍속이며 ‘계(禊)’에서 나온 것이라고 쓰고 있다. 계는 깨끗하다는 ‘결(潔)’과 같은 뜻으로 부정한 것을 씻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찾아가서 몸을 씻고 부정을 털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풍년과 안녕을 빈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여름이라서 더위를 피해 피서에 나서고, 보름날이라 음식을 만들어 술을 나눠 먹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우선 7월이면 보리와 밀은 수확을 마쳤고 웬만한 밭작물들도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과일도 마찬가지다. 봄에 꽃을 피운 과실수들은 이맘때면 익어서 제철을 맞게 된다. 보릿고개를 넘기고 맞는 음력 6월은 나름 농산물이 풍부해지는 때인 것이다. 그러니 잔치를 열 수 있었고, 기왕에 잔치를 벌이면서 수확의 기쁨을 하늘과 땅과 함께 나눈 것이다. 더불어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의 풍년도 빌면서 말이다.

대한금융신문 김승호 편집위원 skylink99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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